살아남은 자의 슬픔…그리고 의무
살아남은 자의 슬픔…그리고 의무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7.02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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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 상황, 위기 때마다 단골 메뉴
영웅담 아닌 이름없는 시민들이 주인공

영산홍이 피는 5월초에 시작한 5·18관련 수배자들의 행적 취재는 밤꽃이 지는 6월 말에 이르러 일단락을 내렸다. 기획취재를 마치며 아쉬움이 밀려왔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었으면 한분이라도 더 찾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첫 취재를 갔던 5월 6일, 서울의 청계천 광장에는 2,000여명의 시민들이 ‘쇠고기 재협상과 검역주권 확보’를 위해 촛불집회를 하고 있었다.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시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국에서 100만이 모였다는 촛불의 위력은 6월10일을 정점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두 번씩이나 하고 청와대 내각이 대거 교체되는 일을 겪었다. 사상초유의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최단기간에 지지율이 폭락하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 횃불이-28년 전 광주 금남로에서는 조국의 민주화를 기원하는 광주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에 몽 민족민주성회를 열었다. ⓒ5·18기념재단 사진집

민청학련과 긴조세대의 유신저항


기획취재 과정에서 수구통치권자들은 그들의 자리가 위태로울 때 항상 극단의 흑백논리를 주요 무기로 삼아 왔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남과 북의 비극적인 분단 상황을 교묘하게 잘도 이용했다.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 대립상황으로 시국을 몰고 가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쉽게 박탈하고, 마음대로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전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이번 취재는 그런 측면에서 몇 가지 큰 의미가 있었다. 유신개헌으로 권좌를 연장한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에서부터 9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좌익으로 몰아 법정살인과 검거를 자행했다. 통혁당,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사건은 박정희의 최대 걸작이다.

인터뷰에 응한 문국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다. 또 1975년 발효돼 유신독재의 종말을 고하던 1979년까지 무려 4년을 유지했던 긴급조치 9호 세대는 학내에서 5명 이상만 모이면 무작정 체포하는 폭압통치의 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심상완(창원대 교수), 박계동(전 국회의원), 김태종(소극장 이구동성 대표), 류이인렬(인디저널리스트) 등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외에 대부분의 수배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독재의 밤이 깊어갈수록 민주의 새벽은 빨리 온다는 말이 있듯, 1979년은 칠흑 같은 독재의 밤이었다. 마침내 오일쇼크가 찾아오며 독재정권의 경제가 파탄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편에선 자본가들은 개발의 미명아래 숱한 노동자의 수탈을 자행했고, YH여공사건 등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을 가까스로 막아낸 박정희는 며칠 후 자신이 아끼던 부하(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사망에 이른다. 통한의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여명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박정희 사망이후 최규하가 중심이 된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12월12일, 권력의 약한 고리를 끊고 권좌에 눈이 먼 군부의 쿠데타가 발발했다. 당시 민주화의 주 세력인 대학생의 방학에 맞춘 계획된 쿠데타. 그들은 정계, 언론계, 재계를 하나씩 장악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정부 수립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은 시국강연회를 중심으로 민주정부수립에 혼신의 힘을 쏟고 김대중, 김영삼 등 야권의 정치인사들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 천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활기를 모색했다.

대학생들은 길고 긴 폭압을 뚫고 학도호국단체제를 무너뜨리고 학생회체계로 전환을 모색했다. 엠네스티, YMCA, YWCA 등 수많은 사회단체들도 민주화의 대열에 합류했다. 민주화의 봄이 오고 봇물처럼 터지는 민주화의 요구는 전두환 등의 쿠데타세력을 궁지로 몰아갔다.

마침내 5월 15일 대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민주정부 수립의 열망은 10만이 넘는 인파를 서울역 광장에 집결시킨다. 이것은 비단 서울만의 상황이 아닌 전국적 상황이었다.

류이인렬씨는 당시의 상황을 “한마디로 감격이었다”고 표현했다. 통한의 회군이라 일컬어지는 5·15서울역회군은 당시의 학생운동을 비롯한 지도부의 한계로 일컬어진다.

박계동씨는 당시의 정황을 “학내에서 도서관 철야농성을 하던 수천 명의 학생들이 17일, 18일로 이어져 계속 철야 농성을 했다면 군부가 쉽게 대학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자책했다. 문국주, 심상완 역시 이 같은 맥락에 생각을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취재 과정에서 왜 광주에서 대규모 저항이 발발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상사태 시 주요활동가들의 지도력과 관련된 것으로 5월 15일 회군 이후 서울의 활동가들은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계엄군에 의해 대학과 서울 전역이 장악된 상황에서 조직적 저항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반면 광주는 달랐다.

시국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서울과 달리 5월16일 교수들의 시국선언과 함께 가두시위가 있었고 도청 앞에서는 민주화 성회와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비상계엄이 확대될 것을 예견했고, 이럴 경우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오후 1시 도청 앞 광장에서 다시 모일 것을 모든 시민과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광주가 폭압적인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결정적 계기가 여기에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취재였다.

도피자의 자책, 참가자의 행복

이번 취재과정에서 파악한 수배자들의 삶은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5월 16일과 17일 예비검속과 항쟁과정에서 체포, 구금된 이후 배포된 수배전단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김태종, 한봉철 씨 등 항쟁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아닌 민청학련, 긴급조치9호 위반의 전과를 가지고 있는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배자들은 다행히 예비검속을 피해 도피한 사람들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참혹한 광주의 소식을 들으며 불안과 초조, 그리고 항쟁과 함께하지 못하는 자책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낸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2년에 가까운 수배생활과 검거과정에서 격은 고초마저 대부분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국주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30여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당시 광주의 영웅이라 불리던 박관현(사망,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씨의 경우 검거 이후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다 끝내 사망했다. 나름대로 항쟁의 복판에 있지 못한 자책감이 일편 작용했으리라 판단해 본다.

반면 항쟁에 참여했던 수배자의 경우 계엄군의 학살과 만행에 대한 울분보다는 시민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해방공동체를 만들었던 7일간의 기억을 더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해방된 공간에서 민주화 성회를 이끌었던 김태종씨는 “계엄군이 오기 전까지 두려운 것이 없었고 굉장히 행복했다. 할일들은 많아 바쁘고 번잡했지만 마음만은 평화였다”라며 당시의 시민공동체를 예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수배자는 아니었지만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프랭카드를 제작하며 문화선전활동을 했던 홍성담(화가)씨는 올해 5·18 추모 기간 중 한 강연에서 “파리혁명 당시의 ‘파리 코뮌’을 능가하는 자치공동체 ‘광주 코뮌’”이라 말하기도 했다. 류이인렬씨는 수배와 검거 이후 이상적인 민주사회의 모습을 광주를 통해 목격하고 희망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 촛불되어- 28년이 지난 금남로, 횃불은 촛불로 바꼈다. 지난 6·10 촛불문화제는 5만여명의 시민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염원했다.

제 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

이번 기획취재의 대상이 된 68명의 수배자들은 언론계, 종교계, 정치계, 의료계, 학계 등 각계각층의 영역에서 묵묵히 자기역할을 하며 성실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죽은 자 앞에서 산 영웅 있을 수 없다”고 말한 한봉철 목사의 말처럼 당시의 수배자들은 부끄러움과 자책을 멍에처럼 가지고 있었다.

3장의 수배전단을 들고 광주항쟁과 관련한 인물들의 궤적을 밟아보며 여건상의 문제로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를 싫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박계동씨가 제안했던 슈피겔지의 사진기자에게 어떻게든 감사의 뜻을 전해야한다는 사회적 책임감도 광주가 떠안아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5·18이 특정인의 영웅담이 아닌 이름 없는 시민들이 참여했던 전무후무한 ‘민중항쟁’이이었다는 점이다. 이번 취재는 드러난 몇몇 이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5·18이 한 인간의 생에 미친 영향 등을 조명해 보고자 했다.

이러다 보니 통사보다 개인사 위주로 서술된 부분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벌써 수 십 일째 금남로에는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수많은 피와 땀으로 이뤄낸 민주주의의 뿌리가 다시 흔들리는 오늘, 5·18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본지가 지난해 입수한 5·18 최초 수배자 명단

   


“광주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되풀이되는 역사, 광주가 말하는 교훈

이번 취재는 사실 5·18광주가 ‘낡은 짐’이 되었다거나 광주에서만 회자되는 지역적인 의제가 된 건 아닌지, 외부인들의 입을 통해 그 답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이들은 5·18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항쟁정신이 피돌기처럼 뻗쳐나가 사회 곳곳의 영역에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광주가 오월을 현재화시키는 작업에 매우 더뎠으며 우리사회 또한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지난 역사적 교훈을 등한시 해온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목에서 광주가 한 마디쯤 화답하는 것도 인터뷰이들에 대한 예의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고 썼던 시인 김준태씨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색깔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이 때 서울 광화문 네거리, 세종로, 광주 금남로에서 5월은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은 “80년 5월이 염원했던 민주주의와 평등세상을 다시 목 놓아 부르짖는 현실이 서글프다”면서 “유장하게 흐르는 역사의 거대한 강물을 포클레인과 굴삭기로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인답게 “피 묻은 칼은 언제나 녹슬기 마련”이라는 비유를 들며 현 정권이 민심의 뜻을 거스르려 하기보다 겸허히 받아 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GNP 몇% 끌어올리려는 욕심보다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더 급선무”라는 주문도 덧붙였다.

본인이 68명의 수배자 중 일인이기도 했던 정재호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소장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와 염원을 반영하지 않고 역행하는 모습은 과거 5·18이나 지금의 촛불집회나 본질적인 성격은 유사하다”면서 “다만 군부는 총칼과 폭력으로 억압해 무장항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됐고 지금의 촛불집회 역시 민주적 방식을 거스르려 한다면 긴장국면이 깊어져 어떤 상승작용을 불러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정 소장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요구와 정치권의역할의 상관관계를 잘 헤아려 한국사회가 민주적으로 진일보하는 계기가 돼야 하며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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