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앞에서 산 영웅 있을 수 없어”
“죽은 자 앞에서 산 영웅 있을 수 없어”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6.25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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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상태교회 한봉철 목사

전남 신안군 신의면 상태서리를 향해 철부선에 몸을 실었다. 1980년 당시 5·18수배자 중  한봉철(51) 목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항쟁 당시 그는 목포공업전문대에 재학 중이었고 수배사유는 시위주동이었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고 정치인도 아니었으며 전문대학 학생이 어찌하여 시위주동자로 수배전단에 오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더군다나 현재 그는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분명 여러 우여곡절이 있으리라 판단하며 극구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를 설득해 약속을 잡았다. 남부해상에 내린 주의보 영향인지 바람이 강하게 불고 파도 또한 높았다.

두 시간 가까이 지나 도착한 신의면 상태도는 생각보다 큰 섬이었다. 여기저기 펼쳐진 그림 같은 염전이 섬마을의 풍취를 더해 주었다. 일행이 상태교회에 도착하자 예배당에선 주기도문의 구절이 흘러나왔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며…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2천여명의 주민들이 염전과 밭농사를 하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상태도에서 한봉철 목사는 주민들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앞장선다. 컴퓨터 교육과 노인복지대학으로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한편 천일염 작목반을 따로 만들어 인터넷 상거래도 시도하고 있다. (사진 왼쪽 하단은 수배자 시설 모습)

기독청년회에서 사회활동 눈 떠

그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자였다. 1977년 판검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소원에 못 이겨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긴급조치9호의 영향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78년 학교에서 제적당한 그는 목포로 내려와 목포공전에 재입학하게 되고 중앙교회에서 청년회활동을 하게 된다. 마침 긴급조치로 인해 서울대, 서강대 제적생들이 목포에 많이 내려오고 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시국과 관련한 얘기들이 자연스레 공론화되었다.

79년에 접어들면서CBS 기자출신인 정건모 목사가 연동교회로 부임하고 그의 영향으로 지역운동의 방향을 잡아간다. 청년회를 중심으로 풍물을 배우고, ‘서양경제사’,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강독하며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된다.

김명원, 서한태, 서지근 등 목포대와 목포공전 을 중심으로 12명 정도가 모여 모임을 만들고 합숙을 하며 차근차근 활동반경을 벌려나갔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의 봄이 오자 이들 모임은 자연스럽게 더욱 활기를 띄게 됐다.

대학에선 학원 자율화 운동을 전개하고 교회에선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유인물제작, 학원자율화 백서 발간, 함석헌, 송건호 초청 시국강연회를 개최하던 중 80년 5월을 맞는다.

진도서 마지막 배 타고 목포로

5월 17일 당시 목포지역 기독청년회장이었던 그는 집(남부교회 옆)근처에서 담당 형사와 마주친다. 담당형사는 당신의 아들이 서울대 재학 중에 자살했던 일로 그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예비검속 대상임과 피신할 것을 알려주며 집에 들어가지 말라 당부했다. 황급히 진도로 몸을 피한 그는 나흘 동안 진도에 머물렀다.

유언비어인지 사실인지 파악이 안 되는 광주에 대한 갖가지 소문들이 들려오고, 수배중인 때라 쉽게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포구에서 육지로 향하는 마지막배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당시 진도는 아직 섬이었다).

오늘 배가 뜨면 언제 다시 바닷길이 열릴지 알 수 없었다. 5월 21일 위험을 무릅쓰고 목포에 도착하자 ‘목포민주시민추진위원회’ 명의의 문건이 나돌고 지역의 어른들과 학생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목포시민과 세계자유민에게 드리는 글’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보게 된 그는 그날로부터 항쟁의 마지막까지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목포항쟁의 복판에 서게 된다.

22일 아침부터 스피커를 비롯한 앰프설치, 연단제작, 횃불시위 준비 등 일에 구분이 없이 닥치는 대로 활동을 시작했다. 성명서도 쓰고 소식지도 제작하고, 계엄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광주에서 오는 시위대를 통해 광주상황을 정리하는 등 바쁜 상황 속에 밤이 오고,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계엄군의 헬기는 목포시 상공을 선회하며 시위대에게 계속 경고방송을 내보냈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 광주로부터 내려오는 투사회보는 유일한 정통 소식이었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되고 그곳의 소식을 접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발 빠른 사람을 구해 광주로 보냈다.

“투사회보는 21일자, 23일자, 25일자를 접할 수 있었어요. 걸어서 걸어서 광주에 간 사람들이 딱 하루 반 만에 돌아오더군요”

대책위를 중심으로 집회가 이루어지고 경찰 추산 7만여명의 시민을 10여명 남짓한 사람이 모두 통제해야했다. 밤낮 구분 없이 잠도 제대로 못자며 대책위를 꾸려가던 중 당시 예비군 중대장이셨던 아버지가 찾아온다.

군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던 아버지는 26일 저녁 지상부대가 목포 시가지에 진입한다는 소식과 함께 피신을 강권한다.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지만 없는 셈 치세요. 나는 여기서 죽을랍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그 길로 돌아가시고 만다. 집안의 만류가 없었냐는 기자의 속 모르는 질문에 한 목사는 “돌아가신 아버님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하며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식 아끼는 부모 마음이 부딪히며 빚어낸 비극에 기자 일행 역시 한 동안 뜨거워진 눈시울을 달래야했다.

C급 단순가담에서 A급 내란주요임무종사자로

▲ 노회의 요청으로 95년도에 부임해 목회활동을 벌인지 벌써 13년째. 상태교회는 주민들의 사랑이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5월 28일 헬기의 선무방송은 광주의 진압소식과 목포시민의 자진해산을 종용한다. 오후 8시경, 횃불시위를 끝내고 돌아온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여기저기서 광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목포의 ‘주먹’들이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지도부를 피신시킨 것이다.

그를 비롯한 학생들이 결사항전을 다짐하자 건달들은 주머니를 털어 1만원을 주며 도피를 사정했다. 당시 선무방송을 하던 고3 여학생이 과로로 쓰러져 병문안 차 기독교병원에 다녀오니 지휘부였던 목포역은 방위들에 의해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그로부터 3개월가량의 수배가 시작됐다.

10여일간 선배집에 숨어있던 그는 교회의 도움을 얻어 인천으로 피신했다. 인천 동인교회 목사님(이욱성)댁에서 머물던 그는 서점과 책도매시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숙식을 해결하며 안정적인 수배생활을 하던 그는 형사들이 이욱성 목사를 연행하면서 근거지가 탄로나 검거되기에 이른다.

수차례에 걸친 조사 끝에 C급으로 분류되었던 그는 505보안대에서 재조사를 받으며 다시 A급으로 분류된다. 1주일간의 조사는 간단했다. 개머리판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웃옷을 벗겨 온몸을 발로 차며 초죽음을 만든 다음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부정하면 다시 두들겨 패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쓴 조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C급의 소요가담에서 A급 계엄포고령 위반 및 내란주요임무종사자로 바뀐 것이다.

“그 안에서 명노근교수, 김승현교수, 이양현씨를 만났어요. 다소 안정된 시기였기에 그분들로부터 내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체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는 징역 2년 집행유예3년으로 받고 그해 12월 31일 석방된다. 이후 학교에서 제적되고 광주에서 생활하게 된 그는 82년 한신대 총장 고재식 박사의 도움으로 한신대에 편입학한다.

당시 제적된 운동권을 다시 받아주는 곳은 한신대와 민중신학자 서남동 목사가 이끌던 기독교장로회 교육원뿐이어서 시국수배자들 중  목사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1990년 목사가 된 그는 해남으로 내려가 아스팔트 인생에서 흙길인생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동안 운동하면 노동운동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접고 농민 속에 들어가 농산물 직거래 운동, 농민상담소 운영, 추곡수매 투쟁 등을 하며 농촌계몽 활동을 했다.

그에게 목회활동과 사회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내 권숙향(47)씨의 도움이 컸다.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격려와 위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노회에서 상태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목사직을 제안 받았다.

1995년 5월 바닷가, 섬, 하얀 모래사장을 그리며 찾아온 상태도의 첫인상은 낭만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온통 뻘밭과 염전뿐이고, 생활복지는 바닥인 섬의 환경에 그의 아내는 목포로 돌아와 연신 눈물바람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너무나 많은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아내를 다독여 정착한 것이 벌써 13년째다.

그는 목회활동뿐 아니라 상태도 섬사람들의 여러 가지 복지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초등학교와 손잡고 섬마을 주민들에게 컴퓨터 교실을 운영하기도 하고, 주요 생산물인 소금을 고급화하고 상품화하는데도 열성이다.

교회 안에 작목반을 만들어 소금을 소포장하여 직거래를 추진하기도 한다. 면과 군에도 서슴없이 찾아가 지역민의 복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사정하기도 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최근 그는 노인복지대학을 만드는 일에 노력을 쏟고 있다. 그가 목회자인지 사회복지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싸다준 김밥이 먹고 싶어

5월을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죽은 자들에게 미안하고 살아있는 것이 늘 부끄러워요. 항쟁 이후 몇 년간 5월이면 습관처럼 망월동가고 집회 나가고 그랬어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거기였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변질되어 간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되요. 세상도 그렇고.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나약해진 것도 같고. 진달래가 피고 5월이 되면 눈과 관심은 거기에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만남도 피해지고…. 그날 아주머니가 싸다준 김밥이 먹고 싶고 광장에 털썩 주저앉아 먹던 막걸리가 그리워져요. 이제는 털어버리고 싶은데 나는 아직도 그러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는 현실 도피일수 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싶다고 했다. 5·18의 현장에 있었고 살아있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고 국가로부터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게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나 그는 여전히 짐을 지고 살고 있었다.

“보상받은 사람들 성공한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더 가난하게 살아요. 그러면서도 받았다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느그는 특혜 누리고 산다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아요. 그것 때문에 사람을 피하는 것 같아요. 가짜도 더 많고 ”

그는 최근 5월 단체의 시끄러운 잡음에 말을 아끼면서도 주객이 전도됐다며 기득권 놀음에 고개를 휘저었다. 그는 5월항쟁과 관련한 모든 사람이 영웅이 아님을 강조했다. 죽은 자 앞에서 아무도 영웅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항쟁 때이다. 그 때 죽었다고 생각하며  덤으로 사는 세상 남들 위해 살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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