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 복판에서 우리는 서로 행복했다”
“항쟁의 복판에서 우리는 서로 행복했다”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6.11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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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항쟁 당시 분수대 위에서 마이크 잡았던 김태종씨

항쟁 당시 도청 분수대의 사회자 김태종씨를 찾았다. 그는 개성으로 향하는 파주 통일전망대 아래 헤이리 예술인촌에서 소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극단 광대, 일과놀이, 민문연, 신명으로 이어지는 광주 문화운동의 복판에 서 있었던 김태종(51) 김정희(51) 부부가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아담한 소극장을 둘러보고 자리를 옮겨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 실과 바늘’처럼 대학 때부터 모든 일에 함께 한 김태종씨와 김정희씨(오른쪽 위) 부부. 김정희씨는 80년 5월을 형상화한 집체극 ‘일어서는 사람들’을 직접 쓰고 연출한 이이기도 하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수배자 시절 김태종씨.

예술과 운동 결합한 극단 ‘광대’


정치투쟁 일변도의 광주 상황에서 문화운동이 설득력을 갖추며 극단 ‘광대’가 창립(1980년 1월)된다. 창립멤버로는 김태종 김정희 김윤기 김선출 김빌립 임희숙 이현주 김영희 김영중 박효선 윤만식 임철우(소설가) 유선규(이상 무순) 등이었고, 이들이 올린 첫 작품은 ‘돼지풀이’. 총 다섯 마당으로 구분하고 각 마당별로 전체회원이 함께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집단창작 방식으로 극이 완성됐다.

언어조탁과 극적 구조의 마술사 소설가 황석영도 힘을 보탰다.  3월 중순경 YMCA 무진관에서 열린 2회에 걸친 공연은 폭발적이었다.

“당시엔 문화패, 운동권 구분이 없었어요. 강신석 목사, 조비오 신부, 홍남순 변호사 등 어른들이 적극 도와주고, 윤한봉(당시 현대사회연구소)은 티켓팅하고 김상윤(당시 녹두서점 대표)은 극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명쾌한 정리분석을 해주고…….”

흥분 속에서 이성 찾은 시민들

민주화의 봄이 무르익고 극단 광대의 회원들은 5월 17일 YWCA에서 함석헌 선생의 시국강연을 듣는다. 김선출, 김윤기, 임낙평 등과 함께 술자리를 하고 당시 휴가 나온 박석면(박석무 동생)과 집으로 몰려간다. 달콤한 잠에 곯아떨어진 새벽, 득달하며 박석무씨가 일행을 깨웠다.

“어제 저녁부터 선배들 다 달려갔다. 난리가 났다.”
계엄령이 확대 발령됐고 공수부대가 광주시가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김태종은 전용호를 만나 유인물 제작을 결심한다.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등사기를 확보해 김윤기, 김선출, 임홍 등과 유인물을 제작한다.

“모래시계에서 터미널 모습이 나오죠? 그것과 똑같아요. 대검에 한 학생이 귀가 잘려나가고 …….”
김태종씨는 18일 당시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살상자가 19일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18일부터 이미 살상이 자행되었다는 얘기였다.

“광주공원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군인 한명을 시민들이 에워쌌어요. 공수부대니 쳐 죽여야 한다며 시민들이 흥분해 있었죠. 그때 전옥주씨가 나서 이 사람은 전투경찰이고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했어요. 시민들은 이성을 찾고 그 군인을 풀어주었지요.”

“저는 전남대학교 학생입니다”
21일 저녁 마침내 계엄군이 퇴각하고 광주는 흥분한 시민들과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진 사상자가 즐비한 무정부상태의 세상이 열린다.

“상원이형(윤상원)이 도청 수습위에 들어갔다 왔는데 개판이래요. 무기를 반납하면 군부에서 사과하고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대책위를 꾸리기 시작했어요. 정상용, 윤강옥, 이양현, 송백회, 들불야학, 극단광대 등이 YWCA에 모여 조직을 꾸리기 시작했죠. 당시 윤한봉, 박관현이랑 연락은 됐는데 광주에 들어오질 못했어요.”

김태종씨는 시민궐기대회 사회를 맡았다. 구심점이 없는 상황이고, 소문에는 전남대 총장이 피살되고 학생들 절반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사실처럼 번지는 상황이었다. 대책위는 도청옥상과 차량에서 가두방송용 앰프들을 떼어내 설치했다.

전파사를 하던 시민 한분이 나서 마이크 시설을 완성시켰다. 이후 그 전파사 시민은 27일 항쟁이 끝날 때까지 그 일을 도와주었다고 했다. 앰프가 설치되고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저는 전남대학교 학생입니다.”였다.

“이 한마디에 모든 시민이 신뢰와 믿음을 주었어요.”
노동자대표로 김영철씨가 나와 피해상황을 보고했고, 농민대표로 나온 윤기현(아동작가)씨가 연설을 했다, 시민대표로 홍희윤(필명 홍희담.소설가)씨가 나와 연설을 했다.

사람들은 홍희윤씨의 연설에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고 한다. 1차궐기대회 이후 일행들은 체계적인 조직을 꾸리기 시작했다.

대책위 총괄기획에는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윤강옥, 궐기대회에는 박효선, 김태종, 대자보 유인물제작에는 전용호, 박용준, 김정희, 최인선 플래카드제작에는 홍성담 등이 조편성됐다. 홍성담은 불탄 MBC 마당에서 ‘전두환 찢어죽이자’는 유명한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그날 비가 왔는데 궐기대회가 어수선했지요. 그때 제가 ‘이 비는 억울한 사람들의 피눈물이다. 모두 앉아 그들의 넋을 달랩시다.’했더니 시민들이 정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요. 우산 모두 개고 질척거리는 바닥에 모두 앉는 거예요.”

24일을 기점으로 광주가 수습되기 시작한다. 초기 수습위가 시민들의 호응을 못 얻은 반면 대책위의 활동은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호응을 받았다. 커다란 가마솥을 가져와 YWCA마당에서 밥을 했다. 목장을 하는 사람은 생우유를 가져와 가마솥에 끓여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관공서를 보호하고, 거리를 청소하며, 닫혀있던 상가가 문을 열었다. 라면 1박스 이상 사지 말자며 매점매석을 거부했고, 금은방, 은행 어디에도 털린 곳이 없었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두려운 것 없었고 굉장히 행복했어요. 할 일들은 많아 바쁘고 번잡했지만 마음만은 평화였지요.”

김태종씨는 프랑스의 파리꼼뮨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광주는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했다.

▲ 전남대 탈패와 연극반 출신들로 꾸려진 극단 ‘광대’는 항쟁 기간 동안 대책위의 중심에서 항쟁을 주도한다. 지난해 5월 극단 광대 단원들이 27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선출(광주정보문화진흥원 팀장)*김빌립(학원 경영)*이현주(교사)*최인선(학원 강사)정용화(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임희숙(교사, 정용화 부인)*김윤기 (화랑 경영)*윤만식(마당극 연출가)*김태종(연극인)임영희(한국철도공사 사외이사)이규현(담양예술인협회 회장)박영정(문화정책연구소 연구원)김융희(이균현씨 부인)전용호(작가)<*표는 극단 광대 단원, *표 없는 사람들은 광대 조력자 혹은 전남대탈춤반 출신 활동가들)

5·18 내란 주요임무종사 및 집회진행


26일 저녁 계엄군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대책위원들은 마지막 회의를 시작한다. 어차피 지는 싸움 최후를 준비한다. 대책위는 시민들에게 진압사실을 알리고 떳떳하게 질것을 결의한다. 살아야할 할 사람과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사람. 윤상원은 최후까지 싸우는 길을 택했다.

“나는 전용호에게 그동안 나왔던 모든 유인물을 종류별로 보관 잘하라고 줬어요.”
김태종은 홍성담의 집으로 향한다. 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진입로에서 계엄군은 자동발사를 하며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를 빠져나온 김태종과 김정희(지금의 부인)는 홍성담의 고향인 하의도로 몸을 피한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왜 하의도로 들어갔는지. 섬은 사람들이 적어 숨을 곳도 없는데 말이야.”
둘은 보름가량 하의도에 머물다 목포로 나온다. 거리며, 식당, 여관, 극장 어디를 가든 수배전단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무안에 사는 선배 집에서 보름, 부산으로 서울로 전전하던 그들은 광주의 동명동 자취방에서 1981년 8월, 공군 보안대에게 검거된다.

김태종은 판사를 잘 만나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죄목은 정동년 내란 수괴 관련 5·18 내란 주요임무종사 및 집회 진행. 김정희는 은닉죄로 함께 검거됐다.

“잡혀서 조사하는데 고문을 할 것 같은 예감을 받았어요. 그래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어요. 바닥을 뒹굴었지요.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의사가 진찰하러 오길래 학생이고 잡혀왔다고 말했지요.”

눈치를 챈 군의관이 보안대 사람들에게 김정희는 급성위염으로 입원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고 군의관과 보안대 사람과 한참 실랑이 끝에, 고문도 피하고 가벼운 은닉죄로 한 달가량 있다 석방되었다고 했다. 평소 연극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학원 접고 헤이리에서 소극장 활동

▲ 잘 나가던 학원강사로 또 학원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모든 것을 접고 파주 헤이리로 들어와 소극장을 꾸리며 다시 광대의 삶으로 돌아왔다.
이후 대학입학 9년만인 198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한 김태종은 학원강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전청련(초대의장 정상용)에서 홍보부장을 한다. 1984년 신명(초대대표 김정희)을 주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1986년 구속자들이 중심이 된 5·18민중항쟁동지회에 참여하기도 한 그는 1990년 10년 만에 다시 도청 분수대에 올라 10주년 기념사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처음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시작한 학원 일이 강남에서 잘나가는 유명강사로, 원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항상 어느 한곳이 허전한 느낌, 광대의 삶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관객이 있는 무대에 서는 것이 광대의 꿈이에요.”
헤이리 소극장은 돈을 벌자면 운영이 되지 않는 곳이다. 극장 카페 형식으로 내부를 꾸민 김태종, 김정희 부부는 주말에 창작극, 음악공연 등을 통해 실험적인 공연을 하고 있다.

“민족극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민족극의 이름으로 그 영역이 얼마나 확대될 수 있는지 그것을 찾고 창조하고 싶어요.”

김정희씨는 실험적인 창작극을 연구하고 공연하며 생활하고 있다. 유명한 ‘일어서는 사람들’의 창작과 총연출의 주인공답게 중년을 넘긴 나이를 뛰어넘어 활동하고 있다.

5·18관련 광주에 대한 소견을 묻자 김정희씨는 화부터 냈다. ‘신명’에 대한 광주시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문화의 도시라 말할 자격도 없는 이들이 광주시와 관련 공무원들이라고 했다.

극단 ‘광대’의 후신이 ‘신명’이고 역사적 전통과 뿌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에 대한 탄압은 납득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시대의 광대들을 조선시대처럼 천민대접하고 기생 부리듯 하는 문화행정직원들의 행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광대의 여성회원들이 오월 어머니상을 받았어요. 상금으로 받은 돈 절반은 단체에 다시 드리고 나머지 절반은 신명에게 주었어요. 상패도 신명에 두고 왔지요. 문화수도를 지향하는 광주시가 문화단체를 탄압하는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김태종, 김정희 부부는 “80년 5월을 돌이켜 보면 많이 배우고 가졌다고 사회선을 더 열심히 실천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광대로 다시 돌아온 만큼 공동체문화를 위한 도덕적 고양을 위해 문화 분야에서 남은 여력을 바칠 생각입니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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