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할 수 없는 지역감정, YS·DJ 책임 커
치유할 수 없는 지역감정, YS·DJ 책임 커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6.04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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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노경규 당시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총책

68명의 수배자 중 80년 항쟁 당시 영남권에서 활동한 사람은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총책이었던 노경규(68)씨가 유일했다. 연락처를 수소문하면서 혹시나 지금도 영남에서 거주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물어물어 노씨와 통화가 되었을 때, 그는 경기도 안양에 살고 있었다.

며칠 후 외국여행 계획이 있다하여 서둘러 취재일정을 잡았다. 안양 시내의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미 기획기사의 일부가 나간 터라 취재흐름에 맞게 순서를 정해오는 꼼꼼한 성의를 보여줬으며, 주요 사건에 관한 자료까지 꼼꼼하게 가지고 와 인터뷰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 노경규 당시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총책.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경남 진주 수정동에서 3남 1녀 둘째로 태어났고 부산 경남고, 부산대 법학과(59학번)를 졸업했다. 대학생활 중에 농촌계몽활동을 2년쯤 하던 그는 농촌활동이 형식적이고 폐해도 있다고 생각해,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부산 장전동의 온천장 다리 밑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2년 가까이 생활하게 된다. 낮에는 공부하고 수업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사람들 깨우치기보다 내가 공부하기 위해 들어갔어요. 책 속에서 배우는 공부도 있지만 다리 밑에 들어가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큰 공부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졸업식에 넝마주이 친구 열 두 명이 큰 망태를 메고 학교에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즐거운 졸업식에 대단한 이벤트를 벌인 셈이다. 그는 2년 가까이 그들과 생활하며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은 넝마주이 친구 한명이 수배자가 되어 도망가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친구들은 주저 없이 자신들의 피를 팔아 멀리 떠나는 여비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온천장 다리 밑에서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한동안 직장생활을 한다. 그 동안 4·19가 있었고 5·16 군사쿠데타와 길고 긴 박정희의 군사독재가 지나갔다. 1972년 유신개헌이 진행되었고 40대기수론을 주창하며 영남에선 김영삼, 호남에선 김대중이 일약 정치스타로 떠오른다.

독재의 밤이 깊어갈수록 민중들의 시름도 깊어지는 법. 1972년 엠네스티(국제인권단체)한국지부가 만들어지고, 1975년 그는 요산 김정한(작가)과 함께 경남지부에서 활동(전무이사)하게 된다. 당시 주로 만났던 사람은 광주의 홍남순(변호사), 대구의 김은집(변호사), 서울의 이돈명(변호사) 등이다.

▲ 1979년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총책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천만인 서명을 주도했다가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100여명의 사복경찰에게 연행되는 노씨. 이 현장사진은 서울신문 기자가 찍은 것으로 나중에 몰래 노씨에게 전해졌다.

유선전화 타고 들려오는 광주의 절박함

“내가 정치에 입문하는 1975년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은 전혀 없었어요. 애향심 수준이었지요. 지역감정은 박정희, 전두환 이들이 경제차별로 인해 발생했지만 이처럼 치유할 수 없는 감정의 골로 발전하는 데는 김영삼, 김대중 이 두 사람의 죄가 커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요. 80년 민주화의 봄, 87년 대선, 이 과정들이 결정적이었지요.”

정치입문과정을 묻자 그는 결론부터 애기하고 나섰다. 최초의 길, 단추를 잘못 끼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75년 당시 남북통일에 관한 김대중의 이론이 더 옳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김대중이 중심이 된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입당하게 된다. 훗날 그가 겪게 되는 숫한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979년 4월 신한민주당 총무를 맡은 그는 종로4거리에서 ‘직선제개헌 천만인서명운동’을 시작한다. 이 일로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군용침대를 만드는 각목으로 온몸을 구타당하고, 끔찍한 것은 각목 끝으로 손등과 발등을 내려찍는 고문이었다고 했다.

수차례 의식을 잃고 기절하기까지 한 그는 부산교도소와 마산교도소를 거처 박정희가 죽자 마산의 정신병원에서 출소하게 된다.

출소 후 민주헌정동지회 부산총책으로 부산 경남의 주요조직을 확장하던 그는 1980년 5월 17일 밤, 김종완(당시 민주헌정동지회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서울의 모든 인사가 연행되었다. 부산시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노경규는 이미 경찰이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한밤중에 뒷담을 넘어 옆집으로 몸을 피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날 밤은 알고 있던 해직교수의 집에서 지내고 다음날 급히 상경한다. 서울로 상경한 그는 광주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하고 5월 19일경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다. 항쟁당시의 마지막 전화통화다. 홍 변호사는 출타 중이었고 사무장이 대신 전화를 받아 창문 밖 쪽으로 수화기를 대줬다.

“광주요? 지금 이 소리 들어보세요. 칭치징 칭칭, 두둥 두둥 와~”
유선전화를 타고 들려오는 광주의 함성소리와 북소리. 그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낀다.

“광주가 저항을 시작했어요. 지금 상황은 무작정 당하는 상황이 아니라 시민들이 똘똘 뭉쳐 계엄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2, 3일 후 다시 전화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 광주와의 통화는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민주헌정동지회 회원들은 광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운다. 광주에서 그렇게 끔찍한 살육이 자행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때이다.

확대된 계엄으로 광주로 향하는 길이 봉쇄되고, 노경규 생에 두 번째로 길고 긴 수배생활이 시작된다. 알고 지내던 목사의 집, 수녀원, 친구들 집을 전전하던 그는 두 번째 수배생활이어선지 노하우가 생겼다.

몸이 아파 병원이나 약국을 갈 때는 옷을 깔끔하게 입고 갈 것, 길을 걸을 때는 팔에 깁스를 하고 가거나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을 것, 미행이 있다는 느낌이 있으면 지하도나 육교의 입구는 가지 말 것, 버스를 탈 때는 항상 마지막에 탈 것 등 검거를 피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체득했다.

수녀원에서 검거를 피하던 중 광주상황을 소상히 전해들은 그는 같은 처지의 학생들과 유인물을 만들기도 했으나 무교동에 있던 코오롱빌딩 건물 내 티파니 커피숍에서 고교 선배인 부산시경 정보과장 일행과 마주친다.

“부산 경남에서 너 혼자 남았다. 나 따라가자. 고생고만하고”
“형님, 모른 척 하고 그냥 가시오.”

일행들과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노경규와 시경 홍보과장 선배의 조용한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됐다. 설득에 실패한 부산시경 정보과장은 일행들에게 강제연행을 지시한다. 허리띠를 빼내고, 두 손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좋겠소. 나 덕분에 진급하게 돼서”
“그런 소리마라, 나도 기분이 안 좋다.”

그는 그곳에서부터 을지로1가 파출소까지 걸어서 연행된다. 개 끌려가듯 끌려간 그는 남대문경찰서에서 수갑을 뒤로 채인 상태로 하룻밤을 지낸다.

“처음에는 유치장의 사람들이 나를 간첩 보듯 하더구만. 밤새도록 묵인 채 누워있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고, 잡범 중 한사람이 권하는 담배가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그 맛은 잊지 못하지.”

▲ 회한에 젖은 노경규씨 - 영남에서는 유일하게 YS가 아닌 DJ를 따라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노씨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배기선, 설훈 등과 함께 동교동계 생활을 했다.

4자필승론, 탐욕스런 정치행태


“당시에 DJ가 들고 나온 것이 사자필승론이야. 4명이 싸워야 이긴다는 논리였지.”
YS가 먼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 DJ가 이어서 하는 단일화 논의가 대세였던 1노 3김의 87년 대선과정에서 선거 중반에 DJ가 내놓은 카드가 4자필승론이다.

그는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영남인들에게 강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논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강변을  들은 지역민들은 거센 반론을 제기했다.

“당시 교황식이든 뭐든 어떻게든 단일화 했다면 지금처럼 골 깊은 지역감정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양김의 탐욕스런 정치행태가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지요.”

결국 선거는 패배했고, 그는 지역에서 이지메가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YS는 그의 고교 선배였다. 선거 개표과정에서 사소한 부정이 발견됐고 이를 항의하고 제지하는 과정에서 그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네 번째 감옥생활을 한다. 87년 초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시위과정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세 번째 감옥생활을 한지 얼마 안돼서였다.

“영남에서는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호남에서는 대접도 못 받는 게 나였어요. DJ가 나더러 영남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라는 거예요. 이미 배신자가 되어있는 나에게 영남에서 후보로 나오라니 말이나 되요? 호남에서 지방의회 의원선거를 YS와 지역출신과 붙여 봐요. 누가 이기는지.”

그는 DJ의 대통령 당선 이후 정치적 배려가 없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야속함을 섞어 말했다.
“광주가 많이 식상해 졌어요. 그 중심에 3김이 있어요. 국민을 담보로 잡고 정치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사람들이에요. 광주는 동학혁명 이후 면면히 흐르던 역사적 사건이에요. 이것이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고 가려져 메아리 없이 그치고 있지요. 나는 이래저래 5·18유공자이기도 하고 민주화유공자이기도 해요. 그러나 광주가 보상을 얼마나 받았나요. 광주의 보상은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정신적 보상이 필요해요. 서울이나 타 지역에선 여전히 냉랭해요. 전 국민이 공감대를 이루는 명예회복은 아직 멀었어요. 안티없는 만델라하고 안티 있는 DJ하고의 차이죠.”

노씨는 2년 후 30주년이 되는 광주항쟁과 관련한 짤막한 소견을 말했다. 세월과 역사를 함께 살고 이제 70노객이 된 노경규씨. 지금까지의 삶에 후회도 있고 허망함도 깃들어 있었다.

“미국의 위컴 사령관이 한국 사람을 들쥐 같다고 했어요. 들쥐 한 놈이 달리면 다른 놈들이 뜻도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간다고. 당시 그 소리에 굉장히 흥분했지만, 간혹 내 인생이 그렇지 않았나 반문하기도 해요. 이제 남은 인생은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데 노력해야지요.”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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