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역사와 현실 두 개의 눈으로 봐야”
“5월 광주, 역사와 현실 두 개의 눈으로 봐야”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5.28 0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③박계동 한나라당 국회의원

항쟁 28주년을 맞는 2008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28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를 찾은 박계동 의원을 같은 날 오후 담양 소쇄원 근처 한적한 식당에서 만났다. 박 의원은 광주를 찾은 몇 안 되는 한나라당 의원 중 한명이었고 5월 말이면 17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터라 바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 박계동(한나라당 국회의원).
박 의원은 1980년 수배당시 고려대 정외과 4학년이었고 수배사유는 시위주동이었다.

1952년 경남 산청이 고향인 그는 1972년 대학에 입학해 엄혹한 유신체제 하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긴조9호, 대학연합시위로 첫 구속

민청학련 사건 이후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학생들은 75년 봄을 맞으며 분출하기 시작한다.

인혁당사건의 조작과 관련자의 사형조치에 반발한 전국의 학생 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4월 8일 고려대에 2,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가 있자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7호를 내린다. 며칠 후 서울대에서 김상진이 항의의 뜻으로 할복자살을 한다.

그해 5월 13일,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다시 발령한다. 7호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해진 9호의 발령으로 학내소요가 잠잠해 질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5월 22일 서울대에서, 5월 28일 고려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게 된다.

일주일 사이에 연달아 열린 시위에 놀란 유신정권은 또다시 대대적인 학생들 검거에 나서게 된다. 전국 8개 대학 연합시위와 관련해 서울대 31명, 고려대 23명 등 수많은 학생들을 검거 구속하기에 이른다.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있다가 구속된 박계동을 비롯한 학생들은 혹독한 감옥생활을 경험한다.

1979년 석방된 이후 학교에 복적하지 못한 박계동은 문국주, 정문화(작고), 김흥민, 장영달 등과 함께 민청협(민주청년협의회)를 조직한다.

박정희가 죽고 계엄령 하에서 민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한 집회를 준비한다. 이른바 YWCA 위장 결혼 사건이 그것. 당시 신랑은 홍성엽(작고)이었고 ‘신부입장’ 소리와 함께 입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문익환목사(작고)였다.

여기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한 뒤 거리시위를 감행한 500여명의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은 2차 집결지인 명동입구 코스모스백화점에서 300여명이 모여 광화문 쪽으로 진출한다.

“덮쳐” 소리와 함께 무술경찰들이 시위대에 뛰어들고, 아수라장의 판에 있던 박계동은 그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한다.

“냅다 튀는데 바로 뒤에서 쫒아오는 구둣발소리가 들려. 바로 팔 뒤꿈치에서…, 그래 안 잡히려고 정신없이 뛰었지. 얼마나 뛰었는지 몰라. 근데 계속 따라오네. 광교를 지나고 술집골목을 돌고 돌아도 따라와. 얼마나 뛰었던지 더 이상 못 뛰겠더라고.

마지막으로 도망친 곳이 고물상이야. 빈 술병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어차피 1대1. 한판 붙어보자 하는 생각에 막 뒤돌아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문국주네. 서울대 문국주(웃음).”

“아니 뒤에서 따라왔으면 본인이라고 신호라도 줄 것이지. 어찌나 허탈하고 겸연쩍던지. 덕분에 위험지역에서 멀리 빠져나올 수 있었지.”

10·26부터 5·18까지는 대단한 권력 변동기였다. 국회의 여와 야, DJ와 YS, 군부와 재야 등 각각의 힘과 힘이 직접 부딪히는 불꽃 튀는 과정이었다. 당시 쓰리 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 전두환 노태우는 차라리 주변부에 속했다.

“당시 정치권은 환상을 갖고 있었어요. 격동의 상황에서 결국은 국회개헌특위를 통해 민주헌법이 만들어지고 체육관선거가 아닌 국민투표로 누가 됐든 대통령이 될 거라고. 그러나 학생들과 민주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그렇게 해서 대통령 되면 10·26과 12·12를 주도한 세력은 쿠데타로 전락하게 돼. DJ 와 YS는 소요를 일으키면 탄압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초기대응을 소극적으로 일관했지.”

쿠데타세력과 결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의 ‘복적생대책위원회’ 학생들은 주저하던 복적을 서두르게 된다.

3월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열망은 5월에 접어들며 절정을 이루었다. 5월 5일, 13일, 14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열기는 15일을 기해 절정에 이른다.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화문까지 진출하려던 10만의 시위대열은 서울역에 이르러 통한의 회군을 하고 만다.

“당시 학내에서 도서관 철야농성을 하던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수천 명에 달했어요. 이들이 17일 18일로 이어져 계속 철야 농성을 했다면 군부가 쉽게 대학을 장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서울역 회군 때 각 대학의 학생회장단 회의는 철농을 해산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지 못했어요. 당시 고대회의는 11시간, 이대회의는 14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쉬었다하자는데 의견 통일을 보았지요.”

이에 따라 학생들은 철야농성을 풀게 됐고, 17일 군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대학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당시 박계동은 복학생을 총괄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장은 신계륜이었다. 당시 서울대는 이해찬이 중심 역할을 했고, 고려대는 박계동 설훈 신계륜 중심이 됐으며, 연세대는 김학민(학민출판사)이 중심이었다.

▲ 서울의봄-1980년 5월 15일. 시민들과 합세한 10만의 시위대열은 서울역에 이르러 통한의 회군을 결정한다.

수배 후 밀항시도 그러나 실패

5월 17일 오전 박계동은 선배인 중앙일보 엄주혁 기자로부터 수배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의 수배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총 460여명에 당시 보수진영이었던 김종필, 이후락까지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군부는 한 번에 모든 정적을 제거하는 일도양단(一刀兩斷)전략을 구사했다. 서울시청 주변은 조지오웰의 소설「1984」처럼 탱크와 장갑차 군인들만 바쁘게 움직일 뿐 민간인은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한 박계동은 그로부터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급한 대로 안동교구에 피신한 뒤, 다시 마리스타수도원으로 옮긴 박계동은 그곳에서 처참한 광주의 소식을 듣게 된다. 정성언(농민회)최권행(현 서울대 교수)등과 함께 다락방에 피신해 있으며, 어떻게든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유인물을 제작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경찰의 급습으로 수도원의 담을 넘어 피신했다. 일행 중 최권행은 경찰이 이미 지나간 자리가 더 안전할 수 있다며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나환자를 치료하는 영주의 다미안병원에서 보일러공으로 위장한 채 생활한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한다. 전두환이 다미안병원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자 다시 피신, 행려환자들이 기거하는 대구 시립희망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8개월가량 정착한다.

이후 김해의 나환자 정착촌에 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송기인신부의 권유로 밀항을 결정한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모든 상황을 종료하려는 신군부세력은 이를 위해 검거한 학생들을 혹독하게 폭력, 고문하기 시작한다.

“50여미터 되는 복도에 양쪽으로 군인들이 도열해 있고 그곳을 지나가게 해. 군화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을 맞아가며 끝까지 가는 거야. 박일남은 처음 1,500만원부터 시작했다더군. 복도 끝에 도착하여 김대중한테 1,500만원 받았느냐고 물어봐. 안 받았다고 하면 다시 1,200만원 출발, 그다음은 1,000만원 출발. 죽기보다 힘든 상황이었다고 하더구만. 중간에 기절하면 쉬었다가 다시하고. 당시 임채정 선배는 귀가 찢어지고……. 결국 박일남이 58만원 받았다고 거짓으로 자백하고. 신계륜은 시멘트 바닥에 집어던져버려 꼬리뼈가 깨지고…….”

이렇듯 내란음모조작과 인권유린은 상상을 초월하게 진행됐다. 당시 정평에서는 박계동과 정순철을 안전하게 해외로 보내 신군부의 조작과 고문사실을 폭로케 하려 했다.

최초의 시도는 대구 동촌비행장 미공군기지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군 수송기를 타는 계획을 세웠으나  미문화원을 방화한 정순철은 안된다 하여 다른 루트를 찾게 된다. 전남 고흥으로 이동한 박계동과 정순철은 사제단 김영식신부와 조명래신부의 도움으로 배편을 준비한다. 그러나 간첩으로 오인한 선장이 몰래 삼천포 경찰서에 신고해 일은 틀어지고 만다. 

오후 6시경 약속 된 장소인 관광다방. 삼천포 수사과장의 얼굴을 알고 있던 김영식신부는 포위망에 걸려든 것을 알고 일행을 데리고 황급히 다방을 빠져나온다. 당시 경찰들은 추가로 수배자가 더 올 수 있다는 판단으로 검거시기를 놓치고, 일행은 곧바로 도망치게 된다.

두 명의 신부는 몸으로 막고 정순철과 박계동은 집들의 담장을 넘고 또 넘으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30여명의 경찰들은 포위망이 넓혀지자 그때서야 전남도경에 연락하고 수사 협조를 구한다. 박계동은 가지고 있던 돈으로 라면박스를 사고, 용달차를 불러 순천까지 요금 흥정을 한다.

그리고 검문소. 빨간 자동차의 미등이 도열해 있는 검문소에서 10여분의 시간이 흐른다. 초조와 긴장, 그냥 여기서 도망칠 것인가? 태연하게 있을 것인가? 준비한 우유를 마시며 얼굴의 일부를 가린 채 태연하게 경찰과 눈빛을 마주친 박계동은 다행히도 그곳을 빠져 나가게 된다.

녹동항에서 헤어진 정순철은 빈집에 들어가 도끼와 지게를 훔쳐, 묘지에서 자기도하고 비닐하우스에 몰래 들어가 자기도 하면서 3일 만에 걸어서 순천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정순철과 박계동의 밀항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 박계동 의원은 그 자체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였다. 수배와 구속, 밀항 시도, 탈출, 정계 입문까지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이 아닌 화해와 타협으로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고 유연한 자세를 강조했다.

최초의 광주사진 獨 슈피겔지에서 다뤄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이의 주범으로 정순철, 박계동, 박관현 등을 주모자로 판단하여 다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한다.

모든 뉴스때마다 얼굴과 인상착의를 내보내고, 신문에 크게 얼굴을 내고 다방이며 식당이며 모든 공공시설에 수배전단을 붙인다. 마을 반상회에서 수배자의 얼굴을 확인한 집주인의 신고로 박계동은 1982년 4월 5일 식목일에 검거된다. 이후 부산미문화원 방화가 문부식과 김현장이 주도했음이 밝혀져, 전두환의 유화조치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1984년 민청련(민주주의청년연합)이 만들어지고 활동의 첫 작품으로 「지금도 광주는 살아있다」는 사진 화보집을 만들게 된다. 이 화보집은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지에 특집으로 실린 광주의 진상을 사진으로 게재한 것이 중심이었다.

항쟁당시 슈피겔지의 사진기자 2명이 광주의 현장에서 직접 찍은 것으로 아버지의 관 앞에서 영정을 들고 있는 아이사진, 쇠사슬에 묶여 무릎 꿇린 시민을 계엄군이 곤봉으로 구타하는 사진, 상무대의 관들에 태극기가 덮여있는 사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는 그 사진이 누가 찍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군부의 만행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명백한 증거가 되어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제는 광주가 그 사진기자 두 분에게 답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수소문하여 그들을 초청하고 인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 의원은 광주를 외롭지 않게 하고 전 세계에 소식을 전한 슈피겔지의 사진기자를 광주에서 찾아 초청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정치활동을 계속한 박 의원은 1993년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쿠데타적 사건’이던 광주의 5·18에서 ‘적’자를 떼어내 명확히 쿠데타로 규정하였고,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광주의 멍에를 치유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후 노태우 비자금사건을 폭로해 권력의 부정부패를 단죄하고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내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2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5월에 대해 역사와 현실이라는 두개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8년 전 광주에 5·18이 있었고 국가기념일이 되었다는 역사의 눈과, 당시에 제기됐던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현실의 눈이지요. 과거의 정치적 대립이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재단했다면 이제는 화해와 타협을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균형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이 5.18묘지에 참배하는 것에 대해 말이 많았어요. 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대통령은 항상 와야 합니다. 광우병, 대운하 이런 현실의 눈으로 보면 안돼요. 멀리서 피켓시위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대통령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참석했을 것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박 의원은 고향 산청으로 내려가 그동안 사람들과 깊어진 감정의 골을 메우는 데 전념하겠다고 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