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학문 열정, 국가폭력에 산산조각
순수한 학문 열정, 국가폭력에 산산조각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8.05.2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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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심상완 창원대학교 노동대학원 노동관계학과 교수

▲ 심상완(창원대 노동대학원 노동관계학과 교수)
경남 창원으로 가는 길, 산천은 녹음이 짙어 그 푸르름을 뽐내는 5월이었다. 산천 군데군데 아카시아 꽃이 만개하여, 아카시아 꽃을 맛있게 따먹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의 5월에도 이렇게 아카시아꽃이 만개했을까?

경남 창원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노동대학원 노동관계학과 심상완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중년의 교수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배전단의 마르고 호리호리한 편이라는 모습과 달리 인자하고 자상한 중년의 교수님이 돼 있었다. 항쟁 이후 흐른 30여년의 흔적이 교수님의 얼굴에서 묻어났다.

긴급조치 9호와 심포지엄 사건

심 교수는 1975년 대학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으며 서울대에 입학한 전형적인 서울토박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인혁당, 민청학련, 그리고 긴급조치 9호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장기집권 연장과 민주인권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획책은 계속됐다. 75년 5월 13일에 선포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개정 또는 폐기 등을 위한 모든 주장과 활동을 일체 금지시키는 조치였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영장 없이도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조항까지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5명 이상 모이는 것조차 신고하지 않으면 체포하는 혹독한 탄압책동이었다.

이로 인해 전국의 대학에서 집회 시위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고, 시위발생 즉시 경찰의 공권력이 학내에 난입하는 폭압정치는 관악캠퍼스로 옮긴 서울대학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심 교수가 3학년이 되던 77년 5월 22일 서울대 사회학과에서는 학회활동의 일환으로 작은 심포지엄이 열렸다. “긴급조치 9호 상황에서 심포지엄은 정상적으로 집회허가를 받았고 무리없이 준비되었어요. 당시 저는 발제자로 참여하고 있었구요.”

교수님은 회한에 잠긴 듯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이 작은 심포지엄이 미래가 창창했던 한 서울대생의 학구열과 인생 전체를 질곡으로 얼룩지게 만들 줄.

“당시 심포지엄 주제는 ‘민족운동의 사회학’이었고 나는 조지훈 선생이 고려대에서 출판한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과 관련한 기조 발제를 하기로 했지요. 학문적 입장에서 순수하게 연구한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제법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경찰은 이를 기화로 시위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에 행사 직전 집회허가 취소를 내렸고, 행사장은 경찰에 포위되고 말았다. 문제는 외부에서 터졌다.

경찰이 행사장을 에워싸고 포위하자 외부에서 학생들이 항의하고 시위로 번져 사건은 크게 발전하게 된다. 결국 심포지엄은 무산됐고, 행사장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연행됐다.

당시 학생 심상완은 단순히 기조발제 내용에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심포지엄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2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79년 제헌절 특사로 석방된다. 순수한 학문의 열정이 국가폭력에 의해 박살나는 순간이다.

예비검속과 300여일의 수배 생활

1980년 5월 15일 민주화의 열망은 절정으로 치달렸다. 10만이 넘는 인파가 서울역에 집결하고 쿠데타를 감행한 전두환 일당은 이에 놀라 장갑차와 군부를 이끌고 나와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5월 16일 심 교수는 당시 학교에서 유인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학회의 여러 친구들이 쓴 글의 초안 중, 후배 이진광이 작성한 글이 제일 좋아 그것을 유인물로 채택했다. 당시의 인쇄기술 수준은 열악하기 짝이 없어 스텐실에다 가리방 철필로 긁거나 초를 입힌 종이에 타자기로 쳐서, 일일이 손으로 등사기를 밀거나 윤전기에 걸어 인쇄하는 상황이었다.

뿌려야할 유인물의 양이 많아 사회학과 연구소 내에 있던 고속윤전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수공업으로 1분에 고작해야 몇 십장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고속윤전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윤전기는 수천 장씩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권태완 교수도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 눈감아 주셨다. 여러 사람이 참여했고,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모든 일은 진행됐다. 같이 유인물을 만들던 사람으로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유종성(전 경실련사무총장) 등이 기억난다고 했다.

5월 16일 오후 11시경 심 교수는 후배로부터 당시의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었고 학교(관악캠퍼스)가 위험하니 피하라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사는 곳이 관악구 봉천동이었던 그는 기숙사를 거쳐 학교 뒷문으로 빠져나가 40여분을 걸어 집에 도착한다.

자정을 넘긴 시각, 집에서는 어머니가 사색이 돼 그를 맞았다. 이미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밤사이 수차례 집을 오간 상태였고 어머니는 황급히 이웃집으로 몸을 피하게 했다.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살고 나온 사람들 중 위험인물이라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수배한 것 같아요. 유인물을 만든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구요.”

심 교수는 가지고 간 수배자 명단을 세세히 살피며 본인의 수배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위험인물로 본인이 지목받게 된 것은 가석방 이후 새문안교회를 다니던 중 YWCA 위장결혼사건(1974.11.24)으로 25일 구류생활을 한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 특별할 것 없었던 대학생에게 단지 유신체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양심에 재갈을 물리려했던 국가권력은 20여년 넘게 그를 주변부로 남겨놓았다. 심 교수는 이를 “역사의 소용돌이”라고 표현했다.
수배 후 입주과외, 고시생 위장 전전

심 교수는 수배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 가정교사를 하던 학생집으로 입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학생의 성적도 올라가고, 과거 전력을 알고 있는 학부모여서 쉽게 승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을 드나들던 친척들이 TV, 신문 등에서 그를 본적이 있다는 등 이야기가 퍼져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친구들 집을 떠돌던 중 동양사학과 선배인 허완의 하숙집으로 들어가 고시생으로 위장하고 두문불출하게 된다. 고시생으로 위장하기 위해  법률서적이 필요했는데 마침 법대에 다녔던 동기생 강금실(현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이 사시에 합격하면서 책을 몽땅 가져와 위장할 수 있었다.

당시에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김사인(시인), 계승혁(고교동창), 이진광(후배) 등이 전부였다.

불심검문을 피하기 위해 주요 이동수단은 자전거를 활용했고, 불가피하게 걸어야하는 상황에서는 여자후배들이 팔짱을 껴 연인으로 위장해 이동하곤 했다.

그렇게 300여일 수배생활을 하다, 1981년 3월 경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유화 제스처 국면 때 경찰에 출두해 수배 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당연히 학교는 제적처리 됐고, 살길이 막막했던 그는 선배의 권유로 땡전뉴스의 대명사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이 같은 계열사로 있던 시기 그 곳에서 발행하던 「정경문화」(월간)에 아르바이트로 여론조사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전두환 군부에 아부하려던 사장의 업무지시를 거부한 일을 계기로 그만두고 말았다.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은 이미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대학강단에 나서고 있던 때였다.

83년부터 89년까지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사연 리포트’가 출판되었던 단체이다. 당시 함께했던 연구원들중에는 임상택, 김형배, 이정구, 황인성, 이미경 등이 있고 손학규, 서경석을 원장으로 조승혁목사, 김영복 목사 등이 책임자로 있었다.

그 후 1990년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사회 구조적 평화연구에 관해 공부하면서 노동문제와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특별히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인한 노동문제 부각, 또 노동자들에게 항상 빚진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교 때 동아일보 살리기로 눈 떠

“내 삶에서 최초의 사회정치적 행동은 고등학교 3학년 때라고 생각해요.”
중앙고등학교 시절, 예비고사가 끝나고 당시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을 심하게 받는 상황이었는데 마지막 고3을 의미있게 보내고자 친구들과 함께 동아일보를 팔아주는 일을 도모했다.

호주머니를 털어 신문을 사서 시민들에게 정가보다 조금 더 비싸게 성금을 받고 팔고  다시 신문을 사서 되팔고, 그러다가 경찰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는데 그것이 본인의 최초 사회적 행위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의 영향과 당시의 시대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별히 시위를 주동한 것도 아니고 달변도 아니고 글도 잘 못 쓰는 자신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면서 그는 “내 뜻과 상관없이 강물처럼 흘러내려온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심 교수는 광주 5·18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었고, 광주는 그것을 힘들게 저항하였고 결국 역사를 정상으로 돌리는 역할을 했다”고. “광주를 생각하면 굉장히 오래도록 답답했어요. 광주는 광주의 몫을 했는데…….”

그는 자기 인생에 대학교수 자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수많은 책들로 겹겹이 쌓여있는 교수연구실. 중견 사회학자가 돼 있는 동기들보다 훨씬 늦은 지난 2003년 창원대 교수로 첫 임용돼 늦깍이 교수로 살고 있는 심 교수는 “지난 세월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다”며 현재의 일에 무척 만족해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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