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1980년 5월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1980년 5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4.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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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은 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내 피는 피가 아니냐”며 눈물로 호소
순서
1.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上)

기행경로
① 전남대학교 정문  - 광주시 북구 용봉동
② 광주역과 터미널 - 광주시 북구 중흥동, 동구 대인동
③ 금남로와 도청 - 광주시 동구 금남로
④ 상무관  - 광주시 동구 금남로1가
⑤ 구 MBC 방송국 - 광주시 동구 궁동
⑥ 양동시장과 광주공원 - 광주시 서구 양동, 남구 구동
⑦ 상무대 옛터  - 광주시 서구 치평동

5월은 진행형이다.
훌쩍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흔히 필자의 세대를 386세대라 한다. 나이가 30대이고 대학의 학번이 80~89로 시작하며, 60년대에 출생한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86학번인 필자가 이제 40대를 넘겼으니 486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학생의 본분으로 공부하는 것이 부끄럽고 편치 않았던 세대이다. 1980년 5월의 상처는 그때 이후 오랜 기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고통 속에 살게 했다.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일부는 사업가가 되었으며 일부는 노동자로 농민으로 살며 한국사회의 주역으로 살고 있다. 그렇기에 5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학살의 주범들은 버젓이 사회를 우롱하고 있으며, 5월을 통해 인식하게 된 미국의 지배력은 여전히 통일을 가로막고 있으며, 항쟁의 주역이었던 노동자 농민의 삶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그래서 5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유혈진압에 맞선 최초의 항쟁, 전남대


10·26 박정희 저격사건 이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12·12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다. 다음해 1980년 길고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이와 함께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아 전국의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들불처럼 번지던 민주화의 요구는 5월 15일에 이르러 정점으로 치닫고 군인들이 탄 트럭과 장갑차가 서울의 거리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민주화의 요구가 결집된 서울역, 그러나 신군부와의 충돌을 피하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학생시위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광주의 피를 부르고 만다.

15일 이후 전국 대부분의 대학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며 소강국면에 들어간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16일 민주화대성회와 횃불집회를 하며 민주화를 요구한다. 전날 ‘서울역 회군’소식을 접한 광주의 학생들도 이날을 기해 정부의 태도를 관망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발생할 상황,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면 오전 10시에 정문, 정오에 도청 앞에서 모이자’는 이 한마디가 현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문제는 18일 10시를 전후해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압이 우발적이지 않는데 있다. 비상계엄이 확대되어 전국의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유독 광주만 유혈진압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학생들과 이를 본 시민들이 분노하고 폭발한 것이다.

전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가 광주민중항쟁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신군부의 쿠테타와 폭압적인 유혈진압에 맞선 최초의 항쟁이기 때문이다.

   
▲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자 최초의 항쟁이 시작됐던 전남대 정문의 지금 모습.
최초 학생들의 저항으로 촉발된 항쟁은 하루가 다르게 시민중심으로 변화된다. 군사쿠테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나 항쟁의 주도 세력이 아니었던 시민들이 항쟁을 주도하게 된 데에는 신군부가 자행한 참혹한 시위진압이 원인이었다.

무차별적으로 곤봉으로 후려치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 피가 솟구치는 등 전쟁터의 백병전을 방불케 하는 공수부대의 만행은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당시의 광주역과 공용터미널 주변에서 발생한 이러한 진압방식은 삽시간에 광주전역과 전남의 시군 전체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을 사전에 검열하고 통제하며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광주역과 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는 21일까지의 일이다.

사람들은 모이면 애국가를 불렀다

금남로와 도청은 항쟁의 시작에서 끝이다.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처참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치열한 저항이 이루어졌다. 계엄군의 조직적인 집단발포가 있었으며, 살기위해 무장한 시민군의 도청탈환작전이 있었다.

무등경기장에 집결한 택시기사들이 광주역, 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를 잇는 차량시위를 벌였고, 21일 이후 도청 앞 분수대에서 수차례의 민주화 대성회를 가졌다. 해방된 도시에서 자율적인 치안이 유지되었고, 은행가가 즐비한 금남로에서 단 한건의 은행털이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다.

▲ 전남도청 앞 분수대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광주의 염원이 모여있는 곳이다. 사진은 항쟁당시인 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리고 있는 장면.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하던 전남대병원, 기독교병원등지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너나없이 헌혈을 했고, 황금동 당시의 사창가 여인들은 주저하는 간호사에게 “내 피는 피가 아니냐”며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사람들은 모이면 애국가를 불렀다.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이 자신의 형과 동생 누이를 죽이는 대한민국에서 광주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TV와 신문에서 광주시민을 ‘폭도’라 하고 ‘좌경용공’세력의 난동이라 발표할 때 시민들은 그렇게 애국가를 불렀다.

일부 언론인들을 경고하듯 서있는 표지석

도청 앞 광장을 돌아 전남여고 쪽으로 길을 잡으면 버스승강장 옆으로 둥그런 표지석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전적지 ‘구MBC’라는 표지석이다. 항쟁 당시 앵무새처럼 신군부의 입장에서 광주를 왜곡시키고 사실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에 분개하여 시민들에 의해 방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 모든 언론과 방송이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MBC와 KBS방송국을 불태웠다.
우발적 전기합선이라는 설도 있으나 후에 KBS 건물도 방화되었으니 왜곡된 언론에 대한 항의표시인 셈이다. 왜곡된 언론을 조장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방송·언론인들이 성지처럼 생각해야하는 전적지이다.

대기업과 관공서를 어슬렁거리며 떡값을 받고, 약자에게 협박하며 강자에게 굽신거리는 언론인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언론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일부 언론인들에게 경고하듯 서있는 표지석이다.

항쟁당시 일부 기자들은 이러한 계엄군의 검열에 맞서 제작거부를 하고 화순인쇄소에서 별도의 신문을 제작하여 학살의 만행을 알리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신문제작과 방송촬영을 시도한 기자들이 있어 항쟁의 형상을 오늘에 볼 수 있다. 

해방광주의 여명을 비췄던 광주공원

▲ 혁명광주를 있게 한 힘의 근원은 부녀자와 노인 등 모든 시민의 대동단결에 있었다.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었던 양동시장은 이것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0일간의 항쟁 중 광주시민이 자랑하는 전적지가 양동시장과 광주공원이다. 광주 전역에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양동시장’과 ‘광주공원’에 대표성을 두었다. 광주시민의 대동의 힘과 단결의 힘이 함축된 곳이다.

당시 대인시장은 계엄군과 시민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시내 중심부에 있어서 대부분의 상가가 철시된 상태였다. 양동시장은 전투의 접전지역에서 벗어난 탓에 시장의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곳이다.

과거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처럼 ‘돈 있는 자 돈으로, 지혜 있는 자 지혜로, 힘 있는 자 힘으로’ 항쟁의 전 기간 동안 밥과 음식 음료수를 만들어 시위 군중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곳이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밥을 짓고 김밥을 만들어 시위차량에 실어주던 광주의 아녀자들과 노인들이 있었기에 광주를 혁명의 고향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한 광주공원은 계엄군의 무차별한 집단발포 이후 자발적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조직되고 사격요령을 훈련받는 장소였다.

넝마주의, 고아, 룸펜 등 그 당시 천대받던 이들이 “나 태어나 세상에 좋은 일 한번 해보고 죽고 싶소”라 하며 총을 들었던 곳. “배운 사람은 죽으면 안 돼”라며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든 총을 뺏어 금남로로 달려가던 곳.

시민들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몸으로 목숨으로 말하며 시민군이 조직되고 칼빈소총의 조작법과 사격방법을 배웠던 곳. 해방광주의 여명을 비추었던 광주공원이다.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이유 없이 대검으로 시민을 찔렀고, 이에 저항하던 자국의 국민을 향해 집단발포를 자행하였으며, 젊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무작위로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일부는 트럭위에서 죽었으며 일부는 끌려와 수날 수일을 맞고 나뒹굴었다.

죽음보다 잔혹한 고문과, 죽음보다 힘든 강제훈련을 받으며, 이유 없는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현장이 상무대 옛터이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수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살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계엄사령부 전남북 계엄분소가 있었던 상무대 옛터는 군사법정까지 만들어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사형과 중형을 선고했던 곳이다. 파렴치한 학살자들에게 요식행위가 필요했을까? 원래 상무대자리가 택지개발로 사라지며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모습이다.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1980년 5월이다.

혹자는 더 이상 5월을 이야기 하지 말자 한다. 혹자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버젓이 ‘일해공원’이라 명명하는 국민이 있는 나라이다. 학살의 당사들이 진심으로 역사 앞에 사죄한 적 없으며, 여전히 당당하게 잘살고 있는 세상이다. /조순경(STORY WON회원)
                                 
※ 항쟁의 전적지 28곳 중 일부만 소개합니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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