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역사의 자리 허락되지 않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역사의 자리 허락되지 않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3.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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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패한 원인은 사상과 문화의 천박함
관리부실로 홀대받는 전라좌수영의 문화재

순서
1.민족정신이 흘러넘치는 보성의 2번국도(上·下)
2. 황룡강에 흩뿌려진 선비정신
3. 화순 땅에 펼쳐진 충과 효
4. 문예와 정치와 충절이 평등한 무등산
5. 담양. 학문의 끝은 어디인가?
6. 곡성, 골골마다 스며있는 애국과 충절
7. 여수, 진남관에서 충무공을 사색하다
8. 혁명의 고향, 해방광주

기행경로
① 충민사    - 전남 여수시 덕충동
② 진남관과 전라좌수영   - 전남 여수시 군자동
③ 고소대(좌수영대첩비, 타루비)  - 전남 여수시 고소동
④ 자당기거지와 오충사   -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⑤ 여수 선소유적   - 전남 여수시 시전동

준비된 영웅 이순신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세계 4대 해전중의 하나인 한산도대첩의 주인공이다. 세계의 4대해전은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592년의 한산도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을 말한다.

대제국 페르시아(동방)로부터 그리스 문명(서방)을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살라미스 해전으로부터 모두가 세계의 역사를 뒤흔든 결정적 전투를 말한다. 특히나 전투의 진법으로 펼친 학익진(鶴翼陣)은 그 지혜와 지략이 탁월하여 세계 해전사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준비된 이순신과 그를 따르는 조선 수군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진남관은 이순신(1545 ~ 1598)을 영웅으로 만든 핵심 근거지이다.

   
▲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변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난 이순신의 집안은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백록(百祿)이 기묘사화로 인해 참변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게 살던 이순신은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1576년(32세)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하게 된다.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 충청병사의 군관,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 등 이곳저곳의 변방을 오가며 파직과 하옥도 몇 차례 당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13일에 이르러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한다.

1592년 4월 13일 20만여 왜군이 부산포에 나타난다.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이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배와 화포 군기를 바다에 침몰시킨다. 육지에서 적을 섬멸하겠다는 장수의 판단으로 해군의 전력이 무너지고 결국 파죽지세의 조선침탈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최전선에 있는 장수의 정보력과 판단력이 부족하면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결과이다.

이순신은 같은 해 5월 4일 최초의 출병과 최초의 승리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단 한번 패하지 않는 싸움을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모함에 의한 하옥과 백의종군 등의 고초를 겪기도 하고, 12척의 판옥선으로 서해로 진출하려는 200여척의 왜선을 저지 격파한 전설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기도 한다.

이처럼 조선을 지키고 왜군의 야욕을 꺽은 이순신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임진왜란은 전라좌수영의 튼튼한 준비에 기초한 이순신의 활약이 전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요인이다.

당시 왜군은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조총의 한계를 극복하고 3개조를 기본으로 연속 사격할 수 있는 전술을 갖추었고, 검의 길이는 조선검에 비해 길고 병사의 칼솜씨는 조선 병사를 능가했다. 이순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총의 유효사거리를 벗어난 포격전과, 거북선을 통한 적진 침투술을 운용했기에 승리 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은 원균이 이끄는 칠전량전투(1597년 7월)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한 이후, 전라도까지 유린한 왜적들에 대항하여 의병들의 활약과 구국의 의지로 인해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1598년 8월 전란의 주범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음으로 인해 길고 긴 7년 전쟁이 끝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수군과 의병들에 의한 구국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36년간의 일제 통치 아래서도 포기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싸웠던 독립군과 의병 그리고 국민의 정신과 문화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영웅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는 법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이순신은 준비된 사람이었다.

그는 왜적의 장점과 단점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지리와 지형에 맞는 전함(판옥선)을 준비하고, 왜적의 조총과 단병접전에 대응하기 위해 거북선을 준비했다. 사람에게 중요한 철학과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설익은 철학과 사상은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궁창으로 내몰기도 한다.

7년 전쟁에서 이순신이 승자가 되고 원균이 패자가 되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 또한 조선이 승자가 되고, 왜군이 패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철학과 사상은 사회적으로 확대되면 문화가 된다.

당시 왜군은 장수가 죽으면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하여 병사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은 장수가 죽으면 부하장수가 지휘하고, 모든 병사가 죽으면 농민이 일어나 다시 싸우는 문화였다.

임란과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원인은 사상과 정신, 그리고 문화의 천박함에 있다. 마치 점령군처럼 설치는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이 이러한 일본의 천박함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조선수군의 주진,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영은 성종 10년(1479) 순천 내래포에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둔 이래 고종 32년(1895)에 혁파될 때까지 400여년간 조선수군의 주진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의 수군영이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1년에 충무공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면서 한층 체계적으로 제반 시설이 정비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1599년 이순신의 후임 이시언이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지어,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건물은 수차례의 화재와 중창을 거쳤고, 1718년 중창된 것이 지금의 뼈대가 되었다.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240평의 대형 건물로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과 함께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 제 304호로 지정되었다.

진남관 앞으로 난 도로를 건너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고소대에 이른다. 여수 8경중의 하나인 고소대는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가 있는 곳이다. 임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영을 지휘하던 곳이다.

타루비는 선조36년(1603)년 이순신의 수졸들이 장군의 덕을 눈물로 흠모하여 세운 비석이고, 좌수영대첩비는 광해군12년(1620년)에 임란 해전으로 나라를 지킨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주변으로 당시의 성이 있었다 하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마래산 기슭에 위치한 충민사는 선조 34년(1601) 체찰사 이항복(1556~1618)이 왕명을 받아 통제사 이시언(?~1624)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인데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받음으로써 이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당이다.

통영의 충열사보다는 62년, 아산의 현충사(숙종 30년-1704)보다는 103년 전의 일이다. 1993년 6월 1일 국가 사적 제 381호로 지정되었다. 충민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란 서당의 홍례문 처럼 임금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곳에 세운 비석이다.

최초 충민사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우회도로를 만들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도로가 역사의 문화재보다 더 중요한 세상이다.

임란 당시의 선소 유적지로 가는 길에 충무공 자당기거지와 오충사를 들렸다.
이충무공 자당기거지는 충청도가 전란에 휩싸이자 모친 초계변씨 부인을 충정공 정대수 장군댁으로 모셔와 기거하게 했던 곳이다.

▲ 군영의 번잡함을 피해 어머니를 기거지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등 전란 중에도 효심을 잃지 않았던 이순신
군영의 번잡함을 피한 곳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등 전란 중에도 효심을 잃지 않았던 이순신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문화적 사적지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조금 더 걸으면 오충사가 있다.
최초 가곡사(佳谷祠)라 하였다. 임란 해전 중 전사한 충절공 정철(忠節公(丁哲) 1554∼1595)을 기리기 위해 1847년(헌종13년)에 국가에서 내린 시호이다.

후에 충의공 정춘(忠義公 丁春 1555∼1594), 충숙공 정인(忠肅公 丁麟 1556∼1595), 충정공 정대수(忠貞公 丁大水 1565∼1599년경)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전사하신 4위를 함께 모셔 사충사라 하였으나 1921년 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이충무공을 주향으로 모셔 오충사라 하였다.

1938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된 것을 1962년 복원하였고 매년 봄·가을(음력 3.16, 9.16)에 본향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임진왜란 당시 나대용장군에 의해 거북선을 제작하였다는 선소. 당시의 판옥선, 거북선을 복원하여 선소의 가치를 높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수1청사 뒤로 선소유적지가 있다. 임란 당시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곳으로 최근에  새로 복원됐다.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복원한 모습이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다. 선소에 배 한척 보이지 않게 복원되어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난한 전라도 땅이라서 그런 것인가? 이순신과 관련한 이번 기행에서 전체적으로 느낀 소감이다. 전라좌수영에 속한 바다건너 남해군의 복원 보습과 비교하면 정말 어이가 없다.

경제적 소외가 문화적 소외 나아가 역사적 소외까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쇠사슬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명랑해전의 전술은 이미 이곳 전라좌수영에서 준비된 전술이었다. 이마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여수의 오늘이다. /조순경(STORY WO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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