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11.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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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밝아오니] 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됨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맹자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하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맹자의 사단설(四端說)은 웬만한 입시나 논술 교재에 수록돼 있고 퀴즈에도 빈번히 출제되는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특히 요즘의 세태를 보노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은 멀지 않아 멸종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학원을 통해 문제를 미리 알고 시험을 치른 학생들이 불합격 처분을 받자 학부모들이 집단 항의를 하고 소송까지 불사한다. 수능 시험을 보던 학생에게 종료시간이 되어 답안지를 빼앗은 감독교사를 학부형이 폭행한다. 이제 한국의 부모들은 오로지 ‘소중한 내 아이’만이  사리판단의 기준이고 아이의 잘못이나 부모의 잘못은 전혀 느끼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잘못과 부끄러움은 ‘교육열’로 정당화된다.

  삼성 재벌의 각가지 로비 행태가 폭로되면서 한국 사회의 낯 두꺼운 도덕적 불감증이 또 다시 한 꺼풀씩 드러나고 있다. 재벌의 법무팀장이었던 내부고발자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성직자들의 양심선언을 후안무치하게 부인하는 삼성 관계자들이나 이른바 떡값을 받은 숱한 법조인, 언론인,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삼성을 보호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절감된다. 돈이면 부끄러움도 살 수 있는 시대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이명박 씨의 숱한 의혹에 대해서도 사법적 판단만이 유일한 잣대인 양 검찰의 수사에 일희일비하고, 도덕적 판단이라는 잣대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후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권이나 유권자들도 부끄러움의 마음은 젖혀 놓고 ‘그래, 도덕적으로 때가 묻었더라도 돈만 잘 벌면 그만이지’하고 안면을 몰수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박완서 씨의 단편 소설이 있다. 1970년대의 서울에서 한 중년여성이 느끼는 후안무치하고 위선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한국인 안내양의 일본어를 듣고 모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는 주인공이 종로거리를 바라본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학원, ○○학관, △△학원 등에서의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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