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주부들 선생님 됐어요”
“필리핀 주부들 선생님 됐어요”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10.23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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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희망이다] 영암자활센터

▲ 원어민 영어강사로 활동중인 필리핀 여성이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중이다.

필리핀 출신으로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시집 온 로즈마리(41.영암 도포)씨. 한국에 들어 온지 꼭 11년차이다. 그동안 아홉 살과 여덟 살 난 두 남매를 둬, 아이들은 벌써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에 다니고 있다.

농사일도 서툰데다 수입도 여의치 않아서 그간 어려움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의사소통이 아직 자유롭지 못해 말벗도 딱히 없는 처지였다. 그녀에게 또한 한국 문화는 여전히 낯설고 낯선 것이었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외로움도 적지 않았다.

방과후 공부방 원어민 영어 강사로 활약

주로 논농사 일 이외에 다른 생활의 기회가 없던 그녀에게 생활의 변화가 생긴 것은 2년여 전부터다. 필리핀에서 시집 온 동료들과 함께 자활센터를 찾으면서부터다. 영암군 관내 4곳에 초등학생들의 방과 후 공부방을 운영해 오던 영암자활센터가 이들 필리핀 주부들을 공부방의 영어 원어민 강사로 파견하게 된 것이다.

로즈마리씨는 이제 주변인들로부터 어엿한 ‘선생님’으로 통한다. 상대적으로 학습력이 떨어질 수 밖에 농촌 아이들이지만 이들에게도 도시 친구들 못지않은 원어민 선생님이 생기게 됐다. 아이들 교육까지 챙겨줄 수 없는 형편인 시골 부모들에게는 큰 점 하나를 더는 기분이다. 수업을 하다보면 고구마며 감자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부모님을 만나기도 한다.

100여만원에 못 미치는 수입이지만 이들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기게 됐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은 생활의 또 다른 활력이 됐다. 비로소 이제 당당하게 한 지역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들 필리핀 강사들은 이제 아이들의 교재비 하나라도 부담을 덜어보고자 스스로 교재를 마련하는가 하면, 매주 평가회의를 가지며 보다 나은 수업을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원어민 영어 교사에는 현재 16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공부방, 복지관 등 영암 군 관내 13개 시설의 강사로 나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과 3년 전 로즈마리씨에게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의 변화다.

▲ 자활참여자들이 공동농장 고추 이식 작업에 분주한 모습이다.
영암자활센터가 설립된 것은 지난 2002년. 영암천주교를 모 법인으로 지역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한 데 모은 것이다. 농촌의 사정이 갈수록 어렵지만 농가 소득과 함께 복지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데 취지를 같이 한 것이다. 이미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나주 등에 자활센터가 먼저 운영되고 있었지만 시를 제외한 전남지역 군단위에서는 영암이 가장 처음이었다.

불신, 좌절 딛고 재기의 꿈 불태워

자활센터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희해 수급권자, 조건부수급권자, 차상위 계층 및 기타 자활?자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활을 도모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만 하더라도 자활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다. 무엇보다 자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

“자활근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 한편으로 그동안 공공근로나, 취로사업 형태로 정부의 울타리 안에 안주해 있던 사람들이기도 하죠. 처음에 자활센터에서 우리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 대부분 먼 산 보듯 했어요. 행정기관에서 시키는 대로 풀 뽑고, 쓰레기 줍고 시간 때우면 돈 착착 주는데 소득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일의 강도도 훨씬 센 일을 나서서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죠.”

이삼행(45) 실장의 말이었다. 우연히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했다가고 몇 달 만에 그만두고 가버린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럴수록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교육훈련을 통해 스스로 독립된 객체로 살아가려는 의욕을 북돋은 것이다. 삶에 지쳐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이 가장 크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2002년 8월 집수리사업단, 복지간병사업단, 영농사업단 45명의 자활근로 참여자를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한 영암자활센터는, 현재 사회적 일자리형 사업단 4개(간병·가사방문사업, 친환경식품사업단, 공예사업단, 채소영농사업단)와 시장진입형 자활사업단 3개(유기영농사업단, 한사랑간병단, 푸른영암사업단) 등 총 7개 사업단에서 82명의 자활근로자가 참여하고 있다.

자활센터가 저소득층 가정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자립·자활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면, 공동체(자활기업)의 출발은 구성원들의 가장 큰 바램이자 목표라 할 수 있다.

▲ 5년째 매년 실시해 오고 있는 '사랑의 김치 나누기' 행사.
2004년 8월 ‘영암집수리’와 간병일을 돕는 ‘선사의 손길’ 공동체를 첫 출발시킨 영암자활센터는, 이후 가정봉사 파견 업무인 ‘돌보미 천사들’과, 최근 출범시킨 ‘원어민영어교사회’까지 총 4개의 자활기업을 배출해 내는 성과를 낳았다. 아직 헤쳐가야 할 일이 많지만 그만큼 자신감도 생겼다.

자활근로사업에서 출발해 공동체, 즉 자활기업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영암 집수리 공동체의 경우도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기술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본래 그 분야에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도 아니어서 지역민들의 신뢰를 받는 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슨 기술이 있겠느냐는 편견이 많았죠. 그러나 막상 일을 해 보니까 값도 저렴한데다 일처리도 손이 다시 가지 않게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다보니 차츰 차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거에요. 대충 마무리 짓고 돈만 받고 떠나는 외지 업체와 다르게, 한 지역에 살면서 연락처도 남겨 줘 나중에 무슨 있더라도 바로 연락할 수 있도록 했죠. 차차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랑의 김치 나누기’, ‘무료 공동주택’...농촌지역 복지 도우미 역할 자임

노인들이 대부분인 농촌 지역이다 보니 면 단위 시골에 들어가면 사업단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전혀 엉뚱한 논, 밭일까지 봐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개인적 민원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돈은 80여만원에 불과한데 지붕이나 대문을 보다보면 화장실도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게 생긴 겁니다. 안 봤다면 모르겠지만 눈에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죠.”

결국 이런 것들이 지역민들한테는 두터운 신뢰감을 갖게 했다. 처음에는 자치단체가 시행하는 저소득층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위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일반 주민들의 주문이 훨씬 많아 계절에 없이 일감을 확보하게 됐다.

자활센터는 한편으로 지역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복지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지역의 여러 사회단체, 농민회, 전교조, 공무원노조, 종교단체, 삼호중공업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보탰다.

매년 ‘사랑의 김치 나누기’ 행사를 가져 관내 독거노인이나 소외시설 등에 전달해 오는가 하면, 지난 2004년 독거노인 세대를 위한 ‘사랑의 집 짓기’ 사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영암읍, 삼호, 신북 등지에 3채의 집을 마련해 독거노인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영암군의 재정지원과 지역 여러 봉사자들의 도움을 함께 모아 군서면에 무료공동주택을 마련해 4세대를 입주시켰으며, 현재 올 연말까지 7세대가 입주할 또 다른 공동주택을 건립 중에 있다.

이삼행 영암자활센터 실장은 “농촌지역 자활센터의 경우 충분한 교육기회나 일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만큼 어려움도 많다”며 “자활센터가 복지문제를 다 안고 갈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지역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 지난해 11월 군서면에 마련한 4세대용 공동주택.

“제가 더 배우고 옵니다”

가정 파견 봉사 일을 주로 하는 안순희(57.영암군 덕진면)씨는 지난해 6월경 자활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10여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던 남편이 사망한 뒤 생활이 더욱 막막하던 무렵이었다.  
안씨는 이제 당당한 직장인으로 변모했다. 1년여 전에는 꿈꿔볼 수 없는 세상이었다. 주변에서는 ‘노력파’로 통한다. 그날 그날 일지를 꼼꼼히 기록해야 하는 일의 성격이었지만 맞춤법에는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만큼 밤새 잠을 줄이며 노력했다.

농사만 지어 오던 안씨에게 직장생활과 사회참여는 처음인 셈이다. 안씨는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며 “자활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전의 기회가 됐다”고 만족해했다.

안씨는 “어려울 때는 세상에서 나만 제일 어렵게 산 것처럼 생각됐는데,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위안과 용기를 얻을 때가 많다”며 “때로는 힘없는 노인들을 도와주러 갔다가 오히려 사는 모습을 보고 내가 반성하고 배우고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안씨는 “그 분들의 고마운 말 한마디를 듣게 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자활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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