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의 근현대사를 다룬 ‘호남현대사’기획에 이어 ‘호남현대사 Ⅱ’ 연재를 시작한다. 호남현대사 Ⅱ에서는 전국 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함평 고구마사건’ 등 전남지역 농민운동사의 중요사건들과 조선대 학원자주화 운동 등 80년대 민주화운동사까지를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
1976년 전남에서 해남, 무안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로 소문난 함평군의 고구마 농사는 대풍이었다. 예년보다 많은 2만5천 톤의 고구마가 생산됐다. 문제는 판로가 마땅치 않았다는 것. 함평군 대동면 백련동 마을 황이권(65)씨는 “특별히 심을 게 없어 마을마다 고구마를 많이 심었으나 보관하기 좋게 썰어서 말린 것(절간고구마. 일명 빼때기) 일부가 제분공장이나 주정공장으로 팔리고 그도 아니면 나머지는 썩히기가 부지기수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피폐한 농촌살림을 돕기 위해 정부는 때마침 농협을 통해 129억 원의 예산을 책정, 고구마를 전량수매하기로 했다. 중간상인들에게 15관들이(2등품 기준) 한 포대가 헐값에 방매되는 것을 막고 농가소득을 지원하자는 취지였다.
절간 작업을 하지 않은 생고구마를 포대 당 1,317원에 수매한다니 농민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농협은 산발적으로 일부만 수매해 갈 뿐 고구마가 얼기 시작한 11월이 돼도 쌓아놓은 고구마를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밭에서 53가마의 고구마를 수확했던 서경원 전 의원(70)은 “10월 중순께 수확한 고구마가 썩기 시작해 마을주민들이 냄새가 심하다며 어서 치우라고 할 정도였지만 농협에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초조해진 농민들 일부는 중간상인들에게 1,317원짜리 고구마를 600원에서 200원까지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산발적으로 농협에 피해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9일 함평군청 앞 청하식당. 가톨릭 농민회(이하 가농) 회원들이 주축이 돼 17명의 마을 대표자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농협에 썩어서 버린 고구마 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고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대책위원회'를 결성키로 했다.
▲ 1978년 4월 북동천주교회 구내마당에서 고구마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단식중인 농민들. 밤에는 교리관에서 이슬을 피하고 낮에는 멍석에 앉아 시민들에게 홍보전을 펼쳤다. | ||
농협은 농민들의 반발에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농민들은 임정택(대책위원장), 노금노(교육조직), 김양혁(조사집계), 임재상(사진), 서경원(대외교섭. 가농 전남연합회 총무) 등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결성하고 11월 말까지 마을을 돌며 자체적인 피해조사에 나섰다.
농협은 경찰과 행정력을 동원해 피해조사에 응한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본인이 생산한 고구마는 본인 형편상 상인에게 판매하였으므로 농협이나 관계기관에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확인서에 서명하도록 종용했다.
농협의 방해공작으로 피해조사는 12월 20일이 돼서야 겨우 마무리가 됐고 피해액은 최종적으로 1읍 4개면 9개 마을 162농가 309만원으로 집계됐다.
대책위는 다음해인 77년 1월 11일 함평천주교회에서 집회를 갖고 피해액을 공개하고 보상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유신치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농민들의 집단반발 움직임은 곧바로 물리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대표자들이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니며 고초를 치렀다. 다른 한쪽에서는 농협이 대책위원들의 다 썩은 고구마를 뒤늦게 수매해 주는 등의 회유책을 병행했다.
함평지역 농민들의 봉기는 전국에 걸쳐진 가농조직을 타고 전국적인 양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함평, 해남, 무안, 강진 등 각지에서 올라온 농민 500여명은 77년 4월 22일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고 농협 도지부에 피해액 보상을 촉구했다.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농협도지부 항의방문에 나섰으나 경찰은 군홧발과 몽둥이 찜질로 농민들을 강제해산시켰다.
이튿날에는 지도신부의 주선으로 당시 고건도지사를 면담하고 농림수산부와 농협중앙회가 현지실태조사에 나서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이때부터 공식개입을 선언한 정부는 행정기관을 동원해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싸움의 양상도 바뀌기 시작했다.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던 농민들의 목소리가 농민소외를 조장하는 유신독재체재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발전한 것.
이후 함평고구마 사건은 6월 서울 동대문천주교기도회, 8월 전국기독교 청년회 부산대회, 11월 전국농민대회 대전집회 등으로 확산된다.
집단단식농성으로 승리 일궈
사태가 커지자 농협도지부는 간접 피해보상을 제시하고 나섰다. 현금지급은 농협의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내놓은 것. 피해농가에 송아지 한 마리를 3년 거치, 10년 상환의 조건으로 불하해주겠다는 농협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대책위와 피해농가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어요. 6개월을 넘기면서 농민들도 많이 지쳐 있었고 협상안을 받아들이자는 쪽이 우세했지요.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른 농민들에게 돌아갈 영농자금을 피해농가가 가로채는 격이라며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을마다 농민들을 모아놓고 협상안을 설명했던 노금노씨의 회고다. 결국 직접보상을 받아내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되면서 송아지 얘기는 없었던 일로 됐다.
단식 5일째인 29일, 농협중앙회는 피해액 309만원을 보상하기로 하고 3년 만에 무릎을 꿇는다. 지리한 싸움이었으나 해방 후 농민들의 요구가 최초로 받아들여진 값진 승리였다.
그로부터 8일 뒤 일간신문에서는 76년과 77년 2년 동안 농협이 주정회사와 중간상인들과 결탁해 고구마수매를 위장 또는 조작하는 방법으로 농협자금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감사원 조사결과 밝혀졌다.‘단군이래 최대의 부정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결국 농협임직원 659명이 무더기 징계를 받고 막을 내린다.
“생존권 투쟁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함평 고구마사건의 두 주역 서경원, 노금노 씨
함평고구마 사건은 정부의 저곡가, 저임금 정책이 농협의 부정과 맞물리면서 구조적인 병폐가 곪아터진 사건이었다.
일부에서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고구마 생산 농가들의 울분이 조직적으로 터져 나온 것은 정부의 소외된 농민정책이 불러온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 정책을 펼치면서 농민들의 희생을 극도로 강요해 왔고 이는 급격한 이농현상을 불러 올 정도로 70년대 중반 농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72년 가농이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농민들은 한국사회의 모순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노금노씨는 “4H 운동, 새마을 운동 등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농촌계몽운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본수탈에 대항하는 농민운동은 가농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맹아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함평보다 고구마를 더 많이 심었던 해남, 무안 등지에서는 농민운동 조직의 세가 약해 고구마 피해보상에 대해 아무런 요구도 하지 못할 때 가농이라는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던 함평은 조직적인 저항으로 맞섰다.
▲ 당시 꼼꼼히 모아놓은 자료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노금노씨.(좌)
고구마를 직접 생산했던 신광면 가덕리 자신의 밭을 가리키고 있는 서경원씨.(우)
서경원 전 의원은 “함평고구마 사건은 이후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각성의 계기가 됐고 기독교 농민회의 조직 등 전국 각 읍면단위에도 농민회 조직이 생겨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이후 강제출자거부운동, 조합장 직선제 서명운동 등 농협민주화운동(19977~1983)과 농지세제 시정운동(1981~1982), 농가부채 탕감운동(1985) 등 농민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된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또 1920년 대 일제에 항거한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단절상태에 놓인 농민운동의 새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유신독재의 종말을 앞당긴 촉매제 역할도 했다.
79년 씨감자 보상을 둘러싼 농민회 간부 테러 사건인 ‘오원춘 사건’으로 유신독재와 농민들이 다시 한 번 맞붙는다. 이 사건은 때마침 발생한 YH여성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사건 등과 맞물려 10.26 사태를 촉발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노 씨는 “학생, 노동, 농민, 인권 등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세력들이 실천적 연대투쟁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으며 생존권 투쟁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승화 돼 향후 한국민주화 운동사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된다”라고 회고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