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브실에서 새로운 우리를 만났다
우리는 너브실에서 새로운 우리를 만났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07.09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여성의전화 사무국장 임수정

애일당(愛日堂)에 갔다. 광주여성의전화의 회원워크샵 장소인 귀후재(歸厚齋) 답사 길이었다. 낮고 좁은 대문을 들어서자 절로 탄성이 터졌다. 성한 녹음, 웅장한 한옥이 한눈에 들어온다. 애일당 오르는 길에 깔린 나무계단은 일부러 놓은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난 듯, 땅과 풀과 한 몸이 되었다. 자갈이 깔린 마당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개들의 눈이 마당 한쪽의 낮은 연못물처럼 고요하고 순하다. 마당 가운데 서서 방금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멀리 낮게 엎드린 산맥들,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곡(廣谷), 너브실답다.

집안으로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이 밴 마루, 아름드리 나무기둥, 사는 사람의 솜씨와 품위가 느껴지는 장식들, 전시장처럼 잘 정돈되어있는 다기, 방바닥에 깔린 대자리, 화려한 문양이 조각된 장롱,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고가구들, 튼튼한 나무 책장과 빽빽이 꽂힌 책들, 창 아래 놓인 앉은뱅이 책상……고아한 분위기에 또 한번,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 삶이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우리 민족이 누리고 살던 것들이었다. 양반가와 일반 민중의 차이는 있었지만 누구나 흙으로 지은 집에 살았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았었다. 현대인의 삶이 획일화된 아파트 공간에서 국적 없는 가구들과 국적 없는 그릇들, 국적 없는 생활에 젖어 살아서일까. 본래 우리 것들을 갖추고 사는 모습이 자못 부러웠다.

애일당을 나와 귀후재로 향했다. 돌아간다와 두텁다는 단어를 조합하면 ‘사람이 나이 들어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면 원칙주의보다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백두산 홍송으로 지었다는 귀후재는 웅장하고 고풍스러웠다. 애일당을 지키는 강기욱 선생이 말했다. 여성의전화 회원들이 와서 터신이 아주 좋아하시겠다고. 여러분이 여기에 온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귀신의 뜻이라고. 여성의전화 회원이 귀후재에서 친목을 도모하고 여성의전화 발전방향을 논의하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이며, 이미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이라고. 너브실에 족적을 남긴 것만으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덕담을 듣다 보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귀후재에서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다. 많이 웃었다. 특별히 재미난 이야기도 아닌데 통쾌했다. 너브실 너른 들판을 넘어 들어온 바람줄기에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맛보았다. 회원들 얼굴을 마주보며 웃다가 웃는 얼굴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며 서로를 격려했다. 문득, 여기 모인 우리는 광주여성의전화의 귀중한 존재라는 생각 들었다.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런 마음, 이런 기분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여성의전화의 앞날은 기분 좋은, 행복한,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 넘칠 것이었다.

귀후재 터신과의 조우는 소진 되었던 광주여성의전화 활동가와 회원들에게 맑은 샘물과 같은 충전이었다. 광주여성의전화 회원들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너브실 터신의 덕인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 강기욱 선생 부부의 배웅은 그래서 더 고마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