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의원님! 향후에도 민주화경력은 유효합니다.
손학규의원님! 향후에도 민주화경력은 유효합니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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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윤 시민기자
손학규의원님! 민주주의 흉내낸지 10년도 안되어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충정은 아름답게 간직해야 하지만 이제 '민주화 운동 경력' 이라는 정치적 기득권을 버려야 할 때"라니요!

[손학규의원, "민주화 경력 이젠 자랑 아니다" 에 대한 답장]

존경하는 손학규의원님!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조금이나마 개혁정책을 통해 정치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뜨거운 신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한나라당의 원천적 태생이 군부독재정권세력의 맹아에 있기에 그 한계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때문에 여야간에 발전적협의가 있을때는 한나라당내 수구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먼저 나서서 잘 풀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손의원님의 "과거 민주화 경력에 따라붙었던 훈장(勳章) 을 겸허하게 내려놓아야 한다"는 모 언론사의 기사는 실로 손의원님께 걸었던 기대를 절망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손의원님도 인정하리라 믿습니다만 지난 97년 대선은 이회창씨가 당선됐던 김대중씨가 됐던간에 건국이래 최초의 진정한 민주정부의 초석을 다지는 선거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회창씨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이 좀더 컸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더 큰 의미있는 대통령선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세계사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모릅니다만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공인받고 있는 영국, 미국, 프랑스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영국의 명예혁명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하여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의회가 왕위 계승을 통제하고 왕권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회는 1689년에 로마가톨릭교도의 왕위 계승, 왕이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권한, 평화시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과 의회의 동의 없는 세금 징수 등을 불법으로 명시했습니다. 국왕은 의회가 제출한 권리 장전(1689)을 승인하고, 의회의 입법권과 과세권을 승인하였습니다.

청교도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국왕의 절대주의와 의회의 입헌주의 간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이 입헌주의 승리로 끝나고, 국가의 주권이 사실상 의회, 곧 국민에게 귀속된 것입니다.

이로써 민권과 왕권의 조화에 입각한 영국의 독자적인 입헌 군주제의 기초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청교도 혁명처럼 유혈을 수반하지 않고 수행되어,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답니다. 한편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일찍 정치적인 혁명을 끝내, 식민지 개척과 경제 발전에 힘쓰게 되었으며 그후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313년전 일입니다.

*미국 독립혁명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으로 부터 "독립선언" 을 대외적으로 공포합니다. 미국은 7월4일을 최대의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을 '독립기념일' 이라 칭합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혁명은 크게 네가지 사건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루어집니다.

첫번째는 '설탕조례'사건입니다.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하여 7년전쟁에 대한 비용을 충당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의 밀무역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1764년 제정한 조례입니다. 세율 자체는 1733년의 당밀조례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적 강제 조치가 수반되었으므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중상주의 규제는 강화되었습니다.

보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상업 식민지가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 발포된 인지조례에 대한 전 식민지의 반항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조례는 1766년 영국 상인들이 영국의회에 압력을 가해 수정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인지조례'사건입니다.
7년전쟁 이후의 영국의 대 식민지입법으로써 인디언의 반란 및 프랑스의 보복에 대비하여 북아메리카에 1만의 군대를 주둔시킬 비용의 일부를 식민지로부터 충당하려고 1765년에 입법했다고 합니다.

이는 법률상 상업상의 증서나 증권류, 주류판매, 허가증, 책자, 신문, 광고, 달력, 트럼프 등에 반 페니 즉, 10파운드의 인지를 붙이려는 규정이었습니다. 이는 관세통제와는 달리 내국 과세이며, 또 국고 세입을 위한 대책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국에 대한 식민지 전체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입법이었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타운센트조례'사건입니다.

이 조례는 역시 영국의 식민지 규제입법으로 재무상인 '타운센트'의 제안에 의해 1767년에 성립되었습니다. 이 법률은 뉴욕 식민지 의회의 권능을 정지하는 법률 , 유리 납 도료 종이 차에 과세하는 수입법 , 아메리카 관세위원국을 설치하고 세관리에게 일반 수색영장을 부여하는 관세징수법 ,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수출되는 동인도회사의 차를 영국에서는 수입세를 면제하는 법률 등의 네 가지 법률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1770년에 차세 이외는 철폐되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독립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네번째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tea)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혁명 직전의 사건으로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주어진 차의 전매권에 반대하여 상인 및 도시의 장인과 소농민은 각지에서 저항운동을 조직화하였습니다.

보스턴에서는 동인도회사의 선박에 적재된 차의 하역작업을 거부하는 민중집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허치슨 총독이 차의 하역을 강행하려 하자, 1773년 12월 16일 '새뮤얼 애덤스'의 연설로 흥분된 급진파인 '자유의 아들들' 일부는 인디언으로 가장하여 3척의 배를 습격하고 1만 5천 파운드의 차를 바다속에 던졌던 것입니다.

이에 영국의 본국 정부는 1774년 6월 1일자의 보스턴 항만조례를 비롯한 일련의 탄압입법을 제정하니 이는 곧 독립혁명의 결정적 분화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영국과 통상을 단절하고 1775년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미국 독립 선언서에 나타난 지도이념을 보면 '존 로크'를 비롯한 계몽사상가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독립선언서에서는 인간의 생명·자유·행복의 추구와, 이를 보장하는 정부의 수립, 그리고 인간의 자연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패트릭 헨리'의 "자유 아니면 죽음"이라는 의회 연설에 의해 크게 선동되었으며, '토마스 페인'은 1776년에 발행한 '상식'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독립의 기운을 드높혔다고 합니다.

그후 1781년 요크타운승전으로 독립을 달성하고 1783년 파리조약에 의하여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3권분립에 입각한 미합중국 공화제헌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물론 초대 대통령은 '죠지 워싱턴'입니다.

미국독립혁명은 독립을 위한 전쟁이자 식민지 귀족에 대한 전쟁으로 민중이 결합한 사회혁명의 과정이었으며 19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미국 역시 피눈물흘리는 역사를 겪으며 "독립기념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미행정부는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불꽃놀이,소풍,퍼레이드등을 통하여 전 국민이 그날의 역사를 기리고 즐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배려하고 있으며 특히 불꽃놀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통제를 하며 안전히 이끌어 이 행사를 경축한다고 합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시민민주주의를 지향한지 225년이 지났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오늘날 프랑스의 가장 큰 국경일인 '혁명기념일'을 잉태한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시민군이 바시티유 요새를 점령함으로써 성공하였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권세와 부귀를 누리던 두 계급(성직자와 귀족)에 대해서 평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그 불만에 불을 지핀 사람은 바로 '루소'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불평등이 없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백성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국민의 의식을 눈뜨게한 '계몽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왕의 통치를 받던 미국사람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오랜 전쟁 끝에 영국인을 몰아내고 독립국가를 세우자 이러한 '평등'의 물결은 프랑스의 지식인 평민들을 크게 들뜨게 만들었고, 급기야 제 3계급인 부르주아들과 귀족계급(성직자와 귀족)간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합니다.

바스티유 요새는 그당시 파리 한복판에 자리잡은 군사요새이자 정치죄수를 가두던 감옥이었는데, 파리시민의 바스티유 점령이 뜻하는 것은 다스림을 당하는 백성이 스스로 깨닫고 단결하여 다스리는 계급과 대항하여 거둔 역사상 첫 승리로서, 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지배자의 손에서 주권을 도로 빼앗은 첫 보기이며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로 향하는 위대한 디딤돌을 놓아준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은 지배계급에서 귀족을 몰아내고 귀족들이 차지했던 지배자의 자리에 부르주아계급이 대신 들어감으로써 결국,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싸움이었고, 국민을 이용하여 부즈주아 계급이 귀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빼앗았다고 하여 부르주아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848년 2월, 프랑스 국민들은 다시 무기를 들고 일어나 부패한 정부군을 몰아냈으며, '루이 필리프'를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다시는 국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기질이 만약 정부나 지도자가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결코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당장 싸우는 까닭에 프랑스 정부는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가 없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사회복지국가로 이끌어 올렸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나라의 국민들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근심과 걱정거리에서 해방이 되어 착실히 일하기만 하면 목돈이 들어갈 이유가 없으므로 아예 목돈을 만들 궁리도, 목돈을 만들려고 애조차 쓰지도 않으며 조금 돈이 모이거나 저축이 되면 그때 그때 써버리고 마는데, 대부분 일년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 여행이나 휴가 즐기는데 아낌없이 써 버린다고 합니다.

212년전 일입니다.


존경하는 손학규의원님!

새삼스럽지만 다시한번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를 떠올리며 "민주주의"를 불러보고 싶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중에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1절을 보면

"내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입니다.

오늘은 왜 이리도 이 노래가 가슴을 저미는지 모르겠습니다. 91년도에 졸업을 하고 군대를 마친 후 대학생활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열심히 살아 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소시민으로 밖에 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손학규의원님!

우리나라는 봉건적 권력(군부독재시대포함)으로 부터 해방되어 근대시민 민주주의시대로 접어든지 이제 8년('문민정부'포함)이 지났습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적어도, 적어도 100년은 돼야지 다른나라의 세계사 교과서에 오르지 않겠습니까?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까? 먼 훗날 후세대들이 "100년전 조상들의 피흘린 댓가로 우리가 복 받은 땅에 살고 있구나"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손학규의원님!

민주주의 흉내낸지 10년도 안되어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충정은 아름답게 간직해야 하지만 이제 '민주화 운동 경력' 이라는 정치적 기득권을 버려야 할 때"라니요!

200년,300년씩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린 조상들을 기리고 그 조상의 후손임을 자손대대로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자부심을 갖고 전통을 이어 가도록 교육시키는 영국,프랑스,미국의 정부나 정치인,부모들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직도 4.19세대가 건강하게 살아 계십니다.

1979년 부마항쟁,80년광주항쟁의 세대가 40대입니다. 1987년 꿈에 그리던 직선제개헌과 민주정부수립을 외쳤던 6월항쟁세대가 30대입니다.

아직도 못 다이룬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고민하는 20대가 시퍼렇게 선배들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땀흘린 당사자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등 각 분야에서 버젓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권리를 포기하라니요!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손의원님이 걱정하시는 기득권(?)은 자연스럽게 '정신'으로 계승되지 않겠습니까?

향후에도 민주화경력은 "유효"합니다.

존경하는 손학규의원님!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강원도의 한 청년이 얼굴한번 못 뵌 의원님께 실례를 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이해를 바랍니다. 아직도 시대를 아파할 수 있는 열정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나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1년 5월

강원도에서 김남윤 드림


PS; 중앙일보 5월5일자 관련기사

손학규의원 "민주화 경력 이젠 자랑 아니다"

"과거 민주화 경력에 따라붙었던 훈장(勳章) 을 겸허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

한나라당 손학규(孫鶴圭.얼굴) 의원이 3일 이렇게 말했다. 孫의원은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충정은 아름답게 간직해야 하지만 이제 '민주화 운동 경력' 이라는 정치적 기득권을 버려야 할 때" 라고 강조했다.

전날 연세대 강연(2일) 에서도 孫의원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1980년대 재야 운동권 인사들의 모임인 '기독교 사회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했다.

孫의원은 "나 역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왔지만 자신의 특정 경험을 강조.고집하는 태도는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 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孫의원 주변에선 "김근태(민주당) , 김덕룡(金德龍) .이부영(李富榮.이상 한나라당) 의원 등이 주도하는 '포럼, 화해와 전진' 에 불참하는 이유를 우회적으로 밝힌 것" 이라고 해석했다.


/김남윤기자는 강원도 강릉에서 활동하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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