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 소비자 주체 농민보건운동 17년째
전국 최초 소비자 주체 농민보건운동 17년째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04.05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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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희망이다]⑪나주 농민약국

최저임금 받으며 논밭에서 농민들과 동고동락

▲ 나주 영산포 터미널 인근에 자리한 농민약국. 약국을 찾은 권이순 할머니가 이연임 약사와 즐거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장날도 아닌 소 도읍의 한 약국에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90년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농민의 약국’을 표방하며 전남 나주에 문을 연 농민약국. 올해로 17년째이다.

농민약국이 태동하게 된 출발점에는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다. 4·13 호헌조치는 역으로 전 국민적 반대세력을 형성하는 도화선이 됐다. 거대한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참 의료인의 길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일단의 젊은 청년들도 그 대열의 한 복판을 지키고 있었다.

“6.29선언 이후 어렵게 모였는데, 이렇게 흩어지게 되면 안 된다고 했죠. 전남은 농도인데, 농촌지역에 들어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해 보자고 한 겁니다.” 농민약국 이연임(41) 약사의 말이다.

6.29선언 직후 ‘민주약사동우회’를 결성한 이들은 그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농촌 진료소 활동에 나섰다. 당시 나주지역 청년운동을 이끌고 있었던 유상욱씨 등이 연계해 매주 일요일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치과, 의사, 학생 등 보건의료인들이 서로 힘을 보탰다.

“반응이 엄청났죠. 영산포 초등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매주 진료소를 운영했는데, 많을 때는 30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몰려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아직 전 국민 의료보험이 안 될 때였고, 병원을 찾으려면 손에 돈 만원이라도 쥐어야 했던 때였죠.”

농민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89년 새해 벽두부터 나주 농민들은 전국 수세싸움의 첫 포문을 열었고, 전국을 뒤 흔든 기운을 모아 농민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3년여의 진료 활동을 통해 약사들이 가야 할 길도 보다 분명해 졌다.

큰 병이 있어도 편히 병원 문 한번 두드리기 힘든 농민들을 보면서, 직접 약국 건설에 나선 것이다. 농촌 활동으로 대중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한 ‘민주약사동우회’는 90년 2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약국 건설에는 약사, 의사들, 농민회 회원, 진료소를 이용했던 농민들까지 십시일반으로 참여했다. 2,000만원 가까운 종자돈들이 모아져, 1990년 4월 ‘농민약국’이 첫 문을 열었다. 약국을 내는데 의료소비자 입장인 농민들이 직접 성금을 마련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국 탄압 18개월 타지 돌며 약 구해 오기도

부푼 출발도 잠시, 곧바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은 한사코 세 내주기를 거부하는가 하면, 보건소에서는 갖가지 트집을 잡아 약국 허가를 미뤘다. 농민약국이 농민회의 자금줄이 될 것을 우려한 당국의 교묘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훼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약국 개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번에는 약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 광주의 도매상 5곳과 국내 제약회사 20곳 모두가 약 판매를 거부하고 나섰다.

“약국 오픈을 하루 앞 뒀는데도 약을 마련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지요.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목포의 한 도매상으로부터 약을 구했습니다. 트럭으로 한 밤중 약을 싣고 와, 밤 12시에서야 약품을 진열한 거죠.”

당국이 탄압의 손을 거두기까지 이들은 약을 구하기 위해 전북으로, 경기도로 수 십번씩 발품을 팔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그 기간이 무려 18개월이었다.

농민약국의 ‘근무지침’은 그들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이어서 유독 눈길을 끈다. 근무지침 1항은 '약국근무는 약사의 가장 기본적 임무이고 가장 중요한 대농민 활동으로 어떤 활동보다 우선 순위에 둔다'이다. 단순히 약국 안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것.

마을 순회봉사 활동도 그 일환이다. 농번기만을 제외하고 매주 마을 곳곳을 찾아 무료 투약활동과 상담활동, 생활 속 건강강좌, 약 오남용에 대한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90년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던 원칙이다.

“안 가본 동네가 없죠. 마을에서 보면 또 다르게 반갑죠. 농민들이 사과도 쥐어주고 오이도 챙겨주고, 김장도 담아주고. 약사와 환자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가 되 버렸어요.”

▲ 농민약국 약사들이 면단위 마을을 찾아서 어르신들에게 간단한 건강체조를 가르키고 있다.

제도개선을 위한 조사, 연구사업도 각별하다. 지난해엔 농부증, 농약중독, 비닐하우스증후군, 농기계 사고 등 직업성 4대 농민 질병과 재해에 대해 산재보험을 촉구하는 입법 시안을 내 놓기도 했다. 이는 특히 농민 질환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직업병으로 인정,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이들 요구에 대해 농림부는 아예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조만간 입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농업관련 연구단체에서도 이미 용역에 들어가, 다음 달 중 보고서가 나올 전망이다.

이외에도 농민 건강과 관련한 세미나를 갖거나, 정책 요구안을 만들어 지자체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정책 입안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쳐 오기도 했다. 지난 18년간 마을 고샅을 누비며 일일이 농민들을 만나 조사해온 결과의 반영인 셈이다.

전국 6곳 개국...나주가 출발지이자 뿌리

나주 영산포에서 출발한 농민약국은 18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현재 해남, 화순 등 전남도내 3곳과 경북 상주, 강원 홍천, 전북 정읍 등 전국 6곳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약사들만 모두 17명. 모두 광주전남 농민약국에서 배출되어간 약사들이다.

농민약국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차지하는지는 홍천농민회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농민약국이 개설될 당시만 해도 농민회원이라야 20여명 남짓에 불과하던 홍천농민회가 현재는 강원도에서 제일 부러움 사는 조직으로 거듭난 것. 지난해엔 농민회에 기여한 공로로 전농 강원도연맹으로부터 ‘감사패’까지 받기도 했다.

농민약국을 만들어 달라는 각지 농민들의 요구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약사들은 순회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농민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농민회는 적절한 교육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궁합이 서로 들어맞는 것이다.

감기기운이 있어 왔다는 권이순(67·나주시 용산동) 할머니가 약사들 자랑이다.

“옛날 장터에서 문 열 때부터 봤지라. 젊은 사람들이 딱딱 알아서 잘 봐주거든. 말도 잘 들어주고 잘 설명도 해주고. 업어달라면 업어준다고까지 할 것이요.”

18년을 지켜 온 이 특별한 것인가 싶은 특별함이 오늘도 농민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다. 

 

 

“농민과의 약속, 지켜야지요”
[인터뷰] 나주 농민약국 이연임 약사

   
 
  ▲ 이연임 나주농민약국 약사  
 
“오히려 축복받았다고 생각해요. 봉사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자신이 꿈꿔 온 철학과 세계관을 실현시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죠. 이런 방법도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월급까지 받는데 이만하면 다 가진 것이죠”

‘농민약국 18년을 지켜 온 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이연임 약사의 답변이었다.

그의 말 속에 오히려 지난 18년 농민약국이 걸어온 녹록치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돈과 직장이 보장되는 굳이 편한 길 놔두고, 부모 곁을 떠나 처녀 약사로 농촌에 들어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국의 탄압을 받던 시절, 어음을 막기 위해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벌렸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다.

어려운 길을 마다 않고 이제는 후배 약사들이 경북 상주, 강원도 홍천, 전북 정읍에까지 나가 지역 현장을 일구고 있다.

“중간약사들도 적어도 2~3년간 이곳에서 훈련을 거치고 파견됩니다. 쉽지 않기 때문이죠. 평생 그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 지역 농민회와 약속을 하고 간 것이니까요.”

이 약사는 “직업상 남편과 주말부부를 지내기도 한다”며 “남편들이 우리보고 ‘농민약국에 미친 여자들’이라고 한다”고 웃었다.

욕심은 천리를 달리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농촌에 관심을 갖는 후배약사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래에는 예비 약사를 길러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강원대, 숙명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우석대, 전남대, 조선대 등 7개 대학에 ‘농민건강 사업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예비약사를 꿈꾸는 학생들과 지속적 교류를 갖고 있다. 4년을 기다리며 투자를 하는 셈이다. 그만큼 농촌이 어려워졌다.

“같이 지역운동을 해 보자고 열심히 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농촌을 떠난 경우가 많지요. 도시로 가겠다는 사람을 더 말릴 수도 없는 현실이죠.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약사는 “이럴수록 농사짓고도 농민들이 떳떳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며 “농민 건강에 관심 갖는 예비 약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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