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매체와 영상매체
문자매체와 영상매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04.0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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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밝아오니]정지창 영남대 독문과교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라는 '4월의 노래' 가사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사춘기의 감상 때문이든 지적 허영심 때문이든 세계명작전집을 '독파'하는 문학소녀나 문학청년이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입시준비와 과외 공부로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고, 대학생들은 노느라 심신이 피곤한 탓에 A4 용지 다섯 장이 넘는 글은 좀이 쑤셔 읽지 못한다.

억지로 책을 읽게 하려고 독후감 숙제를 내도 책은 읽지 않고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제출한다. 궁리 끝에 비교적 재미있고 양도 많지 않은 책 네 권을 미리 소개하고 학기말에 그중 한 권의 내용을 쓰라고 했더니 웬일인지 한결같이 한 권의 책 내용만 답안지에 적어내는 것이었다. 이상해서 물어보니 그 책은 영화로 만들어져 있어서 읽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다.

이른바 전문가들은 바야흐로 문자매체시대가 거하고 영상매체시대가 도래했으니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책보다는 동영상을 매개로 지식을 전달하고 의사를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지식기반사회는 디지털 영상매체가 주도할 것이라는 미래학자들의 예측도 이미 현실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어 일부는 포기하고 일부만 쫒아가면서도, 과연 이 길이 제대로 된 길인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은 늘 뒤통수에 붙어다닌다. 나이가 들면 보수주의자가 된다더니 내가 그 짝인가, 하는 자의식도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를테면 아무리 영상시대라 해도 책읽기를 싫어하는 학생이 어떻게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식기반사회를 이끌 수 있으며, 대학입시나 입사시험의 필수관문인 논술이나 프리젠테이션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좀 엉뚱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문화의 시대라는 21세기에는 한글전용은 하되 적어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기본한자는 가르치는 것이 어떨까? 전통문화와 동양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교육이 필수적이다. 유럽의 인문계고등학교에서도 아무도 쓰지 않는 사어(死語)인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알리고 가꾸어 나가는 일에도 첨단적인 영상매체와 더불어 낡은 20세기의 매체들도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화려한 휴가] 같은 대규모 영화도 만들어 국내외의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희의 5월]이나 [모란꽃], [일어서는 사람들] 같은 연극을 소극장이나 광장에서 장기공연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상매체와 활자매체는 서로 적대적이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읽기를 포기하고 영화나 DVD만 보아서는 21세기의 지식기반사회에 발을 들이밀 수도 없을 것이고 영화나 뮤지컬이 반드시 소설이나 노래보다 효과적인 매체도 아니다. 문제는 다양한 매체가 백화제방(百花齊放)식으로 제각각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와 지식의 소통은 초고속 인터넷 같은 고속도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툰 솜씨의 시민목판화나 [투사회보] 같은 등사판 활자매체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광주에서 이미 경험하였다. 랜드마크니 뭐니 하며 초고층 빌딩과 드넓은 광장 따위에만 매달리지 말고, 정겨운 뒷골목과 올망졸망한 한옥 마을, 아기자기한 포장마차도 두루 살리는 것이 광주를 문화중심도시로 만드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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