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7.03.29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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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⑧김성룡 신부

수강재(壽康齋). 김성룡 신부가 기거하는 공간이다. 완도군 완도읍 중도리, 석장리 선착장과 멀리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김 신부의 집. 목숨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영혼과 육신이 모두 건강하길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1980년 5월항쟁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최후까지 나서서 군사 학살 정권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금남로 죽음의 행진에 나서서 탱크 앞에 드러누워 온 몸으로 광주를 지키려 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 신부는 5·18 이후 군사법정에서 얼토당토않은 재판을 거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년 2개월을 감옥살이 하고 나왔다.

   
 
  ▲ 수강재에서 바라본 바다.  
 
사제직에서 은퇴한 뒤 완도에 자리를 잡은 게 벌써 3년이 넘어간다. 봄날 진달래 개나리 수줍게 피어나는 남도의 산과 들을 넘어 완도 바닷가 성당으로 찾아갔다.

그의 거소인 수강재를 둘러싼 비탈에도 진달래가 한창이다. 멀리 해지가 가득한 바다가 보인다.

5월정신 욕되게 말고 초심 지키기를‥

▲ 젊은시절(1976년대 후반)의 김성룡 신부.
커다란 유리 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해 74세의 김 신부는 매주 세 차례 완도에서 광주로 공부하러 다닌다. 한의학과 동양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침술과 뜸 등 전통의학도 배운다고 귀띔이다.

“은퇴하기 전에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다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게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명으로 받아들여졌어. 그래서 ‘우선 내가 건강해야겠다. 나를 모델로 그 모습을 보는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게 하자. 저렇게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겠다는 희망 말이지.”

그는 선배 신부들이 말년에 병으로 아파서 고생하는 모습, 병중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 모습을 봐왔다. 건강하게 죽는 선배 신부들이 드물었다. 시대 탓이었을까.

그가 말하는 건강은 육체는 물론 영혼, 정신을 아우르는 건강. 육체와 정신, 생각과 생활까지 신의 섭리하신 자연 안에서 친환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신은 인간에게 자연과 함께 살도록 섭리하셨는데 인간은 정복과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을 파괴하고,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는 악순환을 그만둬야 한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건강한 상태에서 하느님이 부를 때까지 기쁘게 살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떠나는)나도 행복하고, 보내는 이들도 기쁘게 보내지 않겠는가.”그가 한의학과 동양사상에 심취한 것은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내 몸도 치료를 하고 내 몸을 알아야 건강할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했다. 우주와 몸의 신비를 깊이 느끼는 계기가 돼 많은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완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2004년. 10여년 전 완도 본당 신부로 재직할 때 집자리를 잡고 2004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수강재 집터는 바다가 보이는 명당을 찾던 그가 포기할 무렵 나타난 장소. 그래서는 “하느님이 아껴두신 땅 같다”고 말하고 있다. “집터를 잡는 데서부터 공사하고, 집안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까지 다 하니님이 처음부터 간여하신 것이야. 집 지을 때도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셨지.”

방은 실내까지 황토벽돌로 마감하고 바닥도 황토로 깐 뒤 장판없이 곧바로 대자리를 깔았다. 짓기는 자신이 지었지만 광주교구 신부들에게 휴양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화제를 슬슬 80년대로 되돌렸다. 80년 당시 김성룡 신부는 남동성당에 있었다. 남동성당은 광주의 명동성당처럼, 인권의 보루로 알려진 성소다. 그는 자신이 80년 항쟁에 참여한 게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라고 한 발 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남동성당 본당 신부로 있는데 엠네스티에서 만난 민주인사들이 도청 인근에서 가깝고, 갈 데가 없으니 나에게 찾아왔어요. 모인 사람들이 이(5·18의)비극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겠는가. 수습하자. 그래서 시작한 것이지. 그런 것을 군발이 놈들이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계획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만들었어요.”

군부의 학살로 항쟁이 끝나고 계엄군에 잡혀간 그는 반국가죄로 15년 형을 선도받았다. 그러나 여론에 밀린 재판정은 고등군법회의에서는 12년으로 형량을 줄이더니 대법원에서 다시 깎아서 6년형으로 감형했다. 실제 수감생활한 기간은 1년 2개월. 90년대에는 재심을 통해 아예 무죄판결을 받았다. 물론 그 기간은 십수년의 긴 세월이었고, 고문과 고통, 감옥생활, 투쟁의 힘든 나날이었다.

하긴 스스로도 강성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80년 5월 25일. 일요일 미사 강론에서는 “우리가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한다”는 말을 했다.

후일 전단에까지 실린 것으로 전해진 강론은 공수부대가 시민을 짐승처럼 끌고 다닌 데 대한 분노, 폭로로 몰리는 데 대한 저항이 담겨 있다.

“앞으로 우리는, 아니 도민은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한다. 어찌 사람처럼 두 발로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짐승이다. 공수부대는 우리 모두를 짐승처럼 끌고 다니면서 때리고 찌르고 쏘았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또 폭도라고 왜곡된 보도를 했으니 이 사태가 수습되면 우리는 모두 폭도가 될 것 아닌가. 우리 도민 모두가 폭도요, 새로 태어난 자식도 폭도의 후손이 될 것이다. 외지에서 누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으면 전남이 고향인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몰릴 것은 사실이 아닌가.

자 이러한 상태 속에서 단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책임있는 당국자 즉 국가 최고 원수인 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과하여야 한다. 보상과 복구를 하여야 한다. 보복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온 국민 앞에 천명하여야 한다. 우리는 피의 값을 받아야 한다. 받지 못하면 다 죽어야 한다.”

죽기 싫으면, 짐승이 되기 싫으면, 폭도가 되기 싫으면 다 투쟁하자는 주장이었다.

80년 5월27일 새벽. 지역의 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는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부터 탱크를 앞세우고 조여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청에서 비상 회의가 열렸다.

“총을 들고 도청을 지키던 젊은 친구들이 어른들한테 와서 위협적으로 달려들어요. 어떻게 할 거냐는 거지. 그 때 강하게 말을 했어.(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장) 너희들이 여기를 지켜라.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우리가 총알받이가 될 것이고, 협상이 된다면 다행 아닌가.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 그래서 수습대책위원들에게 같이 가자고 해서 탱크 앞까지 간 것이고. 그 때 독일 출신 기자들이 우리가 함께 걷는 걸 보고 총알받이로 간다고 하니까 제목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붙였어요.”

탱크가 버티고 있는 농성동. 탱크의 위압감보다는 분노가 더 크게 가슴에서 일어났다.

“난 죽을 각오로 갔으니까, 두렵지도 않았어요. 이 놈들이 국민 앞에 탱크를 몰고 왔구나. 양쪽 건물 옥상엔 기관총을 배치하고, 도로 위에도 시멘트포대로 진지 만들어 기관총을 배치했더라고. 시민에게 총을 겨눈 것이지. 적을 물리치고 국민을 보호하라고 준 무기를 가지고 주인인 국민을 겨냥하는 게 무슨 군인이냐. 이따위 놈들이 무슨 국군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같은 그의 분노와 신념은 군사재판정에서도 이어져 함께 재판받던 사람들까지도 놀라게 했다.

“재판받을 때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형량이 더 늘었는지 몰라. 당신은 우리보고 폭도라 한다. 그렇다면 좋다. 국민을 총칼로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이 저 자식지 저지른 죄목은 뭐냐고 따졌어. 겁도 없이 말을 했지. 옆에 있던 이기홍 변호사가 옆구리를 쿡 찌르더라고. 그만 하라는 거지.”

그가 이처럼 담대하게 발언한 데는 신앙의 힘이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너희가 잡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 안의 성령께서 다 말씀해주실 것’이란 성경 구절을 생각했다.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에요. 나도 모르게 그런 강성 발언이 튀어나왔거든.”

그는 5·18을 새로운 인생을 가게 해준 은혜로운 사건으로 가슴에 담고 있다. 그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김성룡 신부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1년 2개월의 감옥살이도 신앙으로 버텼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행복했어. 대법 판결이 끝나고 며칠을 한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내 인간적인 오기와 투쟁심, 교만, 인간적인 기대 등을 모두 하느님이 뺏어가고 눈물로 녹인 거야. 마음이 비워지니까 기쁨으로 채워주신 것이지. 기쁨이란 단어도 약해. 넘치는 기쁨, 환희랄까.”

영적 깨달음, 카타르시스, 해탈의 순간을 넘긴 그의 얼굴은 다른 수감자에 비해 훤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부친이 면회를 와서 밖을 나갈 때는 기쁜 얼굴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 볼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

“당시에는 차라리 그냥 죽을 때까지 그(감옥) 안에서 살고 싶었어요. 이처럼 또렷한 하느님의 현존을 밖에서도 경험할 수 있을까 할 정도였지요.”
그 비움의 시간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악에 받친 기도가 나왔었단다. 살인마에 유황불을 내려주시면, 다시는 군인들이 국민을 학살하는 일이 없을 것 아니냐며 기도하기도 했다.

육체적인 면에서는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독방생활. 오후 4시면 독방의 열쇠가 잠긴다. 오후 5시면 저녁 간식이라고 국수를 판다. 감옥에서 . 죄수들에게 장사를 하는 것이다. 유난히 저녁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 감옥이라, 해가 지고, 햇볕이 희미해지면 눈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10촉짜리 전구에 시력을 맞추는 통증이다. 그 시간이면 또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오늘도 출감의 희망이 가버리는 시간, 재소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김 신부는 스스로 당시의 좋지 않았던 건강상태로 죽지않고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말한다.

시계를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리자, 김 신부는 현실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광주항쟁 27주년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이어가야 될지 등에 대해서 ‘노코멘트’라고 입을 닫았다. 간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가 흘러가듯 젊은 사람들이 바통을 이어받고,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참지 못하는 속의 말을 하고 만다.

“다만 희망사항이라면 욕되게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거지. 기념재단인가 하는 것도 비난을 많이 받고, 생각지도 않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어요. 그 쪽 단체들에서 나에게도 자꾸 우편물을 보내지만 보지도 않고 태워버립니다. 아예 안 가요. 일체 참여를 안 해. 5·18기념식 때는 대통령도 내려 온다고 초대하는데, 난 미리 가서 참배해요. 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도 싫어요. 사람들이 순수해야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얽히고설켜서 재미없어요.”

1987년 6월, 김성룡 신부는 목포 산정동 성당의 본당신부로 주석하고 있었다. 그가 본 목포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캄캄했다고 한다. “오갈이 들어서, 얼마나 핍박을 받았으면, 사람들이 찍 소리도 못하고 지내더라고. 그 때 내가 가서 시가행진도 하면서 (목포 사람들이) 터진 거야.”

▲ 그는 정치적 문제데 대해서는 말을아꼈다. 그러나"민주주의는 스스로 지켜야한다"는 말을 할때는 강한 성격이 그대로 비쳐졌다.
그는 정치문제나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며 말을 피한다. 하지만 극심해진 빈부격차와 사회 양극화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다.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것은, 그것은 총칼만 안 들었지 당시 그놈들보다 더 징한 놈들이 많이 활개치고 있는 것이다. 총칼이 아니고 제도다. 없는 사람은 대물림하고, 있는 놈들도 애초에 자기들 것이 아닌데 이것이 부조리지. 시작부터 빚을 끌어안고 일어나야 하는 비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문학적인 재산을 물려받아 처음부터 그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양극화는 총칼보다 더 무섭다. 사람 죽이지 않더냐.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노인·노동자·학생들까지 모두 자살한다. 모든 게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그 원인을 정권유지에 눈 먼 정치권력이 무분별하게 들여놓는 서양의 문화에서 찾았다.

“특히 역사도 없는 미국에서 상놈들의 더러운 것만 전부 가져왔다. 역대 정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교육도, 법도, 노동 사회도, 가정까지도 엉망이다. 인류 기본단위인 가정이 우습게 파괴되고 있다. 큰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추악한 동물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를 전략공천한 민주당에 대한 비판은 이같은 판단의 연장으로 보인다.

“김대중씨는 스스로 다섯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원인은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된 뒤 그걸 없앴어야 한다. 최소한 개정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걸 안 하고 노벨상만 탔다. 자식들은 문제를 일으켜 전라도에 똥물을 끼얹었다. 그러고도 그 아들이 또 (국회의원에) 나오더라고....”

그렇다면, 우리 국민은 올해 2007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치러야 할까. 김 신부는 “온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고 일갈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며, 자신의 건강을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건강할 때 그걸 지켜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지키려고 피를 흘리고 희생했는가. 국민 모두가 자기 몫을 해야 한다. 자기 건강을 의사에게 맡기는가? 민주주의를 특정 정권에 맡기면 되는가?”

한나라당 대권 주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를 얻는 데 대해서도 국민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정치인, 기업인, 교육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나라당이라는 게 이름만 바꿨지. 국민의 피비린내가 지금도 나는 데 그걸 한나라당이란 말로 미화시키고 국민을 속이려는 것 아닌가.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국민들이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한심하다. 더럽게 타락했어. 그래서 그 값을 치러야 해요. 정신을 못차리면 더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 살인당,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국민이 건강하고, 가정이 건실해야 사회가 잘 돌아간단다.
“선거 때마다 자기의 몫을 하고 책임을 지는 국민이 됩시다. 눈치 보고 따지지 맙시다.”

▲ 완도군 중도리에 지은 수강재앞의 김성룡신부. 황토벽돌로 아담하게 지은 이 집 마당에 서면 완도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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