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 소리 ―흑산도 각시당
풀피리 소리 ―흑산도 각시당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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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시와 그림]임동확
검은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섬 언덕엔 아직도 그 어떤 배반도 용서 못하는 풍랑의 눈동자, 행여 떠나려는 기색이라도 하면 느닷없이 돌풍을 불러오고 험한 파도를 일으켜 연신 출항의 닻을 움켜쥐는 손길이 살아 있다. 하지만 도대체 다스려질 줄 모르는 광기와 무질서를 일시에 제압하는 풀피리 소리에 그만 순한 짐승처럼 고분고분해진 얼굴, 끝 모를 유배와 긴 고독의 항로 속에서 제대로 된 기회라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찾아온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려 어요, 에허야 돛폭을 찢고 뱃전을 부수는 성질 사나운 마녀가 있다.

제 안의 악마적인 주술과 어두운 저주를 쫓는 풀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처녀로 다시 환생해, 결코 호의적인 것만이 아닌 사랑의 기적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자들을 어이, 영차 일으켜 세우고 있다. 오로지 죽음의 길만이 허락된다는 듯 누구든 떠나려하면 어김없이 뱃길을 가로막고 드디어 쾌속선마저 침몰시키며, 그 어떤 섣부른 이별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오직 사랑만이 제 유일한 가치이고 목적인 한 계집이 닻줄처럼 온 바다와 하늘을 끝장낼 듯 감아쥔 채 돌연 하나의 온전한 세계, 늘 새로운 시작의 수평선 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

▲ 박문수 작. 가거도 부부바위.
[시작노트]

섬에 우연히 들린 한 청년의 풀피리 소리에 반해 놓아주지 않았다는 흑산도 진리 처녀당의 전설을 접하는 순간, 결코 우호적인 것만이 아닌 사랑의 적의와 마성(魔性)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나려고 하면 폭풍과 파도를 일으켜 결국 그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어쩌면 무례하고 난폭하기만 당각시의 사랑법을 잊고 지내지 않는 것인가. 오직 단 한 사람의 피리소리에만 제 안의 광기와 무질서를 길들여지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던가. 문득 사랑은 가장 이기적일 때 가장 이타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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