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시와 그림]임동확
검은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섬 언덕엔 아직도 그 어떤 배반도 용서 못하는 풍랑의 눈동자, 행여 떠나려는 기색이라도 하면 느닷없이 돌풍을 불러오고 험한 파도를 일으켜 연신 출항의 닻을 움켜쥐는 손길이 살아 있다. 하지만 도대체 다스려질 줄 모르는 광기와 무질서를 일시에 제압하는 풀피리 소리에 그만 순한 짐승처럼 고분고분해진 얼굴, 끝 모를 유배와 긴 고독의 항로 속에서 제대로 된 기회라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찾아온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려 어요, 에허야 돛폭을 찢고 뱃전을 부수는 성질 사나운 마녀가 있다.제 안의 악마적인 주술과 어두운 저주를 쫓는 풀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처녀로 다시 환생해, 결코 호의적인 것만이 아닌 사랑의 기적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자들을 어이, 영차 일으켜 세우고 있다. 오로지 죽음의 길만이 허락된다는 듯 누구든 떠나려하면 어김없이 뱃길을 가로막고 드디어 쾌속선마저 침몰시키며, 그 어떤 섣부른 이별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오직 사랑만이 제 유일한 가치이고 목적인 한 계집이 닻줄처럼 온 바다와 하늘을 끝장낼 듯 감아쥔 채 돌연 하나의 온전한 세계, 늘 새로운 시작의 수평선 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
섬에 우연히 들린 한 청년의 풀피리 소리에 반해 놓아주지 않았다는 흑산도 진리 처녀당의 전설을 접하는 순간, 결코 우호적인 것만이 아닌 사랑의 적의와 마성(魔性)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나려고 하면 폭풍과 파도를 일으켜 결국 그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어쩌면 무례하고 난폭하기만 당각시의 사랑법을 잊고 지내지 않는 것인가. 오직 단 한 사람의 피리소리에만 제 안의 광기와 무질서를 길들여지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던가. 문득 사랑은 가장 이기적일 때 가장 이타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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