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천재과학자 재조명 절실
월북 천재과학자 재조명 절실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6.11.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남현대사 현장을 찾아서②북으로 간 천재과학자 리승기
북한의 미사일발사에 이은 핵실험으로 10월, 11월 국내는 물론 국제정세가 어지러웠다. 이 와중에 과연, 북한의 핵기술 수준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들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는지에 대한 저간의 궁금증들이 네티즌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소식 가운데, 북한의 저명한 과학자 한 사람이 전라도 담양 사람이란 소식이 나온다.

▲ 리승기 박사의 젊은 시절 사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에서 태어난 리승기란 이가 그 주인공이다.
리승기 박사.

그는 1905년 이곳 창평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떠난 뒤 일본 교토제국대학 화학공업과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아 모교인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민족을 사랑했던 리승기는 일본에서도 제국의 패망을 예언하다 감옥생활을 했지만 일제까지도 그의 과학 기술에 대해서만은 깍듯한 존경을 표하며 자문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 귀국, 서울의 경성대학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듬해인 1946년 정부가 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로 바꾸는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해 고향 담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제국 일본마저 인정한 천재과학자 리승기를 가만 두지 않았다. 제자들의 설득에 다시 서울대로 복귀했다. 제2대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북으로 넘어간 것은 서울대 재직 때 6.25가 터진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일제시대부터 민족적으로 알려진 과학영웅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도 그를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북한 전체에서 몇 안되는 박사 과학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일본 교토에서도 합성섬유 제 1호인 비날론(Poly Binyl Acetate)을 발명한 인물이었다. 석유에서 추출해낸 합성섬유에 비해 그의 발명품인 비날론은 석탄에서 섬유를 추출해낸 것. 당시는 물론 오늘날의 과학 기술에 비춰 봐도 눈부신 과학적 개가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은 전쟁 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월북을 종용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전쟁으로 북한이 서울에 진주하고,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그에게 김일성의 위임을 받은 한 인사가 찾아와 비날론연구소를 설립해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북으로 가자는 것이다.

이 때 찾아왔던 사람은 북한 산업성 부상인 이종욱. 그의 제안은 선택이 아닌 명령형일 수밖에 없었고, 제자 몇 명과 가족이 함께 서울역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북에 넘어간 리승기 박사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융숭했다. 평안북도 청수 지방에 연구실을 꾸며줬고,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제공해줬다. 김일성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연구 결과 1961년 연간 2만톤 생산 규모의 대규모 공장이 완공되었다.

북한 정권은 리승기 박사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제1회 과학부문인민상을 수여하였다. 1967년 북한 영변원자력 연구소장이 되었고, 1980년대 초 과학원 함흥분원장에 취임했다.

리승기 박사가 병으로 잠시 누웠을 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는 김일성이 그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리승기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등 북한 인민에게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핵 개발은 반대하던 그는 김일성의 끈질긴 설득으로 핵 개발에 참여,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 공로로 김일성 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음이 한국 합동참모본부가 발행한 ‘합참’지에 소개된 바 있다.

▲ 리승기 박사 생가.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 안쪽의 리 박사 생가 마당에는 100년 쯤 된 소나무와 모란나무가 유서깊은 가문의 내력을 말해준다.
창평 시장에서 봉산면쪽으로 나가는 국도 29호선을 타고 5분여 거리를 가다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장전마을. 자동차 한 대가 다닐만한 좁은 농로 한 켠으로는 사람 키만한 배롱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늦가을을 맞아 잎사귀도 떨어지고 노란 가지만 앙상하지만, 여름이면 빨간 꽃길이 아름다웠을 길이다.

리승기 박사의 생가는 마을의 가장 안쪽, 대숲 아래에 아늑하게 터를 잡고 있다. 양녕대군의 후손 덕수 이씨들이 모여사는 이 마을에서 5공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씨도 태어났다. 이한기 전 총리는 리승기 박사의 제종 아우이다.

지금 이 곳 리 박사의 생가를 지키는 이는 리승기의 6촌 아우인 이준씨(65)다. 7대 종손에다 외아들이었던 리승기 박사가 북으로 가는 바람에 덕수 이씨의 종가를 지키게 된 이준씨는 “초등학교 시절 몇 차례 형님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령 100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양 팔을 벌린 듯한 자태로 손님을 맞이하고, 마당엔 방형의 연못이 보존돼 있다. 안채 뒤편에는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가 자태를 뽑낸다.

리 박사가 태어난 사랑채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안채에 이준씨 부부가 기거한다.
이씨는 사랑채가 지어진 지는 153년, 안채는 100년이 좀 넘었다고 정확하게 전해준다. 건물을 살펴보니 기둥이 굵직굵직한 것이 여간한 부잣집이 아니었겠단 생각이 든다. 튼튼하게 지어졌던 것이다. 150년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보존상태가 좋아 보인다.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사진이 혹시 있는지 물었다.
그는 조용히 사랑채에서 흑백사진 한 장을 가져와 보여준다. 젊은 시절의 리승기 박사 얼굴이다. 이준씨는 “가보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 사진 외에 자료는 하나도 없다. 연좌제의 사슬 속에 북한 관련 이야기는 커녕 사진이든 뭐든 모조리 뺏기고,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이 알아서 태우거나 없앴다”고 이념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생채기를 되새김질한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이 납북인지 월북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지난 시절 이념에 가려져 있던 월북-납북 인사들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리승기에 대한 기념사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형식 전 담양군수가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을 비롯한 기념사업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선거에서 낙마하고 말았으니 새판잡이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비날론 발명, 핵 기술의 핵심 인재로 북에서 대접받았다지만, 과연 리승기란 인물이 북으로 가지 않고 남에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남북의 과학이 분단되지 않고 하나로 모아 연구와 개발이 이뤄질 수 있었더라면 오늘날 훨씬 더 수준 높은 기술문명으로 선진국대열에 올라 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2년째, 세상을 떠난 지는 10년이 됐다. 북한에서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國葬)으로 예우해줬다고 한다.
분단된 이념을 떠나 과학자로서 리승기의 업적이 재조명될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가 문화재 지정 보존방안 마련되길"
[인터뷰]리승기 박사 6촌 아우 이준씨

   
 
▲ 리승기 박사를 대신해 생가를 지키며 살고 있는 6촌 아우 이준씨.
 
리승기 생가에서 만난 이준씨는 1996년 2월 6촌 형님인 리 박사 별세 소식을 듣고 2년여 동안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 때는 형님의 제자였던 고려대 전 국순흥 교수나 마형석 교수 등이 서로 연락하고 기념사업회도 만들자고 여러 가지 자료들도 모았는데 왠 일인지 몇해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고 흐지부지 되어 아쉽네요.”

남한에 남아 있는 리 박사의 제자들 역시 80을 넘긴 고령의 학자들이어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나마 국내에 남아있는 제자들도 서너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형님을 봤습니다. 그 때 서울에서 형님이 내려오신다고 하니까 군수를 비롯한 지방 유지들이 줄줄이 마중을 나가서 대대적으로 환영해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환대를 받았던 그이건만 전쟁과 분단으로 어느 누구도 ‘이승기’란 이름을 입밖에 낼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해외 유학도 포기해야 했다. 지금도 간첩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단다.

피는 대물림을 하는 것인지 이준씨의 두 아들도 과학자가 되어 대덕 연구단지의 외국 기업체의 연구원 등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은 제가 기와도 바꾸고 청소도 하면서 집을 지켜왔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고가를 보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념사업도 좋지만 리승기 박사 생가가 153년 된 한옥인데 문화재로 지정해서라도 보존 방안이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리승기 박사 생가를 지켜온 이준씨의 바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