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리역
송정리역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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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와 그림]임동확
▲ 새벽 어스름의 기차역 전경. /시민의소리 DB
까만 교복 흰 칼라의 통학생들이 장마철 개미떼처럼 몰려 왔다가 빠져나가고, 자못 비장한 표정의 까까머리 청년 하나 입영열차 창밖으로 힘없이 손을 흔들어댄다. 쓰디쓴 희망보다 절망의 달콤함을 먼저 알아버린 역전통 아이들이 어설픈 불량기를 과시하며 행인들을 눈흘겨보고, 늙은 포주들이 불쑥 나타나 긴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팔짱을 잡아끌고 어둔 여관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제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을 적재한 서울행 또는 목포행 완행열차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은 지 오래인 송정리역.

생전의 아버지가 계엄령에 갇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그칠 줄 모르는 폭설 속에 서 있다. 좀 더 키가 크고 팔뚝이 굵어지면 한 주먹에 때려눕히고 싶던, 광대뼈가 주먹처럼 단단해보이던 군내버스 매표소 청년이 나주, 나산, 대산, 함평, 문장, 영광가요를 연신 외치고 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떠나가거나 떠나보내지 못한 채 미적거리며 밤늦도록 흑백 TV 켜진 시절의 대합실.

그만 잊힌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던 그들이 꿈처럼 녹슨 철길을 타고 문득 말을 건다. 어디곳에선가 활짝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가는 추억의 나팔꽃이 새로 단장한 역사를 기어오르고, 도대체 순종할 줄 모르는 발견이며 갱신인 시간의 발걸음들이 유월의 바람처럼 개찰구를 무단통과하고 있다.

결코 붙잡을 수 없었던 그 어떤 세월의 움직임, 그러나 느닷없이 다가왔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제트기처럼 그 알 수 없는 것들이 굉음을 쏟아내면서.

[시작 노트]

개인 사정상 2주일에 한 번씩 송정리역에 내리게 되면서 어느 날 문득 생전의 아버지가 역전광장에 서 있는 착각에 빠진 적이 있다. 또한 어느 날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끝을 스쳐간 바람 속에 언제가 맡아본 적이 있는 고향의 머윗대 냄새가 실려 있는 것을 느낀 바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을 오가거나 고향을 오르내릴 때마다 마주쳐야했던 송정리역은 그 때마다 새로운 추억의 풍경들을 돌려주곤 했다. 망각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던 시간들의 흑백사진들, 그러나 원하건 원치 않건 내 마음 속에 살아 떠도는 영원한 현재의 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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