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기억과 망각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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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밝아오니]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정년을 맞은 학자나 연로한 문인들의 걱정거리 가운데 하나가 책을 처분하는 문제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생 모은 고서나 자료를 학교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되고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곤 했지만, 요즘에는 출판된 지 10년 넘은 책들은 웬만한 중고등학교 도서관에서도 받지 않는다니 평생 모은 장서가 자랑이 아니라 골치 아픈 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백 년 이상 된 책이나 자료는 골동품으로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만 어중간한 것들은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분류되어 폐기처분하고 마는 것이 요즘 추세다. 이른바 정보화시대의 현기증 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낡은 정보는 새로운 정보로 금방금방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기억들은 빨리빨리 잊어버리고 그 빈 자리에 새로운 정보를 입력시켜야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능한 현대인이 되는 것이다. 웬만한 과거사는 대충 덮어버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논리다.

전화번호나 노래 가사, 기제사 날짜를 잘 외우는 사람을 머리 좋은 사람으로 치던 것도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지금은 핸드폰이나 가라오케에 입력된 전화번호나 노래 가사를 빨리 찾아내고 컴퓨터에서 필요한 정보를 빨리 검색해내는 능력이 총기나 기억력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은 농경문화가 산업문화로 바뀌면서 필요한 정보의 수명이 급격히 단축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농경문화는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이래로 수천 년 동안 전승되면서 켜켜이 쌓아온 적층문화이므로 과거의 기억과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산업화·정보화시대에는 어떤 점에서 신속하게 과거를 망각할수록 정보화의 효율성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기억의 평균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옛날 얘기를 들려주던 동네 사랑방의 얘기꾼이 사라지고, 책 읽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정보화시대의 특징이다. 가난하고 양심적으로 살다 죽은 젊은 시인의 기억도 장례식장을 나서면서 금방 폐기처분되고 만다. 그러니 과거사 규명이니 뭐니 하며 수십년 전에 죽은 민초들의 죽음을 따져서 무엇 하랴마는 보수 언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제 FTA가 피할 수 없는 악몽처럼 다가오면서, 농촌도 농경문화도 너무도 쉽게, 효율적으로 망각의 회로 속으로 던져져 처리되는 것이 서글프다. 이문구·송기숙의 작품들이 전집으로 엮어져 도서관의 서가로 유폐되고 나면, 농민문학도 살아 있는 현실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사 속의 한 개념으로만 존속하지 않을까, 답답할 뿐이다.

/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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