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5.18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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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주말마다 오르는 산길에 온톤 빨간 진달래가 불붙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상하는 꽃소식이 아닌 4월혁명과 5·18민중항쟁 기념일이 전해 주더니, 올해에는 몇 번 겹친 황사 소동으로 늦게 핀 산수유와 진달래를 통해 아픈 봄이 왔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5·18민중항쟁은 국가적인 기념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봄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취지에 걸맞지 않는 지역 행사나 눈도장 찍기에 바쁜 정치인들의 순례 품목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27주년을 앞두고 민중항쟁동지회를 비롯한 '5월 단체'들에서는 '5월 정신을 통일 역량으로' 등의 슬로건을 중심으로 행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제 무엇보다 구호 못지않은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다.

얼마 전 몇몇 문인들과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주민 및 시민운동가들과 군 당국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 다녀왔다. 황해에서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칼바람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지만, 물이 말라버린 빈들에 드문드문 만들어진 못자리들이 가슴을 애이게 했다. 왜 멀쩡한 물꼬를 막아 난장이처럼 작고 파리한 모를 만들어 버렸을까.

미군으로부터 용산 미군 기지를 반환받는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뿌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대추리에 가서 보니 그 몇 배나 되는 땅을 내주고 거액의 국민 혈세를 퍼부어 건설해 준다니! 일제치하 일본군 비행장 건설 명목으로 옥답을 빼앗기고, 해방이 되어서는 미군에게 점령당하고, 이제 되찾나 했더니 뿌리마저 뽑힌 채 쫓겨나야 하는 슬픔은 주름 일렁거리는 대추리 토박이 할머니만의 슬픔은 아니었다.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하는 건 미군은 뒤에 숨은 채, 우리 군경과 주민·시민운동가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아이러니였다.

그런데 나는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의 싹을 보았다. 밤 들어 대추리 초등학교 마당에 마련된 천막음악회에 참석했었는데, 의외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비닐하우스 안이 훈훈했다. 마치 계엄군의 진압 소식 앞에서도 두렵지 않은 듯 시민들이 자발해서 모였던, 5·18 해방구의 시민대회 같은 분위기였다.

운동권 노래와 구호가 난무하던 예전의 시위 현장과는 달리 유명 영화감독이 나와 참여 의지를 전하고, 천진한 서울 어린이들이 나와 하모니카 합창을 들려주는 등 뭉클하면서도 여유 있는 음악회였다. 이런 따스함에서 숨은 힘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목을 메이게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자리에서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 씨 말고는 광주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천막음악회의 감동을 안고 돌아오면서 광주는 결코 타임머신 저 너머의 낡은 이야기가 아니며, 오늘 여전히 살아있는 문제임을 느꼈다. 광주의 5월이 미국의 실체를 처음으로 벗겼다면,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운동들 역시 5월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5·18민중항쟁이 전 국민의 것이 되고 통일 역량이 되려면, 박제된 현실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참여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름지기 5월 단체 관계자들은 물론, 나아가 영원한 부채감을 갖고 살아가는 광주 사람들은 묵묵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자신들의 것으로 내면화할 때 5·18은 박제에서 벗어나 생명을 갖고 통일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상과 예우 등 사후 처리에 급급하지 말고 오늘 딛고 선 좌표를 읽어내고, 끊임없이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5월은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움직임과 하나가 될 때 그 건강성과 운동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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