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바꾼 글래드스턴의 상식
영국을 바꾼 글래드스턴의 상식
  • 정지아
  • 승인 2006.04.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간시평]정지아 소설가

자존심도 타고 나는 것인지 우리 아들 녀석이 아주 어려서부터 잘못했다는 말을 죽어라 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애 기죽이면 안 된다고, 사람은 자존심도 강해야 큰일을 하는 법이라고 놔두라셨지만, 나는 오직 그것으로만 아이를 나무랬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이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 끝내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회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 실수든 한계든 의도된 잘못이든 통틀어 잘못을 극복하지 않은 채 성장하는 인간이나 사회를, 미문한 탓인지 모르나 나는 아직까지 보고 들은 바가 없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한국의 문화재를 도굴한 일본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시종 잘못했다고 그야말로 싹싹 빌었다. 절도범에서부터 고위 정치인이나 경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께서는 우리 사회가 잘못해놓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며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 그 근본적인 이유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제 잘못을 집안이나 친구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다 큰 어른이 여전히 남 탓만 하고 있는 것은 영 모양새가 좋지 않다. 우리 전(前)세대가 오늘날의 현실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한들 이제 와서 그들을 탓해 무엇 할 것인가.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의 문제도 친독재의 문제도 부정부패의 문제도 사실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깨끗한 정치로 정평이 나 있는,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에서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기까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자기 표를 몇 파운드에 판다는 푯말까지 내걸 만큼 타락했던 영국의 선거를 오늘날처럼 깨끗하게 만든 것은 1883년에 제정된 ‘부패 및 위법행위방지에 관한 법률’ 덕분이었다. 우리가 영국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이 법안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글래드스턴이 사상 초유의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수상이라는 점에 있다.

무수한 인간들의 집합인 사회라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거대하고 그래서 막연하다. 사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진실은 언제나 명백하고 단순하다. 비록 우리는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으나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는 것. 이전에 잘못한 사람들까지 벌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지금까지 잘못한 것은 용서하고 지금부터 잘하자는 것. 이 단순명료한, 그야말로 상식적인 생각에서 수백 년간 지속되었던 부정부패가 일소된 것이다.

일전에 문학평론가이자 재야사학자였던 고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를 뵐 일이 있었다. 임종국 선생이 젊은 날 친일파의 명단을 뒤지다 흥분해서 집으로 달려왔단다. 당신 아버님의 친일행적을 자료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그 명단에서 나를 제외하면 네 연구는 거짓이 되지 않겠느냐?”
임종국 선생의 누이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한 오빠의 연구 덕분에 아버지도 편히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비록 친일을 했으나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상식을 지녔던 임종국 선생의 아버님은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 임종국 선생은 아버지의 잘못까지 세상에 갚는 아들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소설가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