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낡은 책 사이에서
야구와 낡은 책 사이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3.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간시평]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레식(WBC) 본선에서 일본 국가대표 야구팀을 두 번이나 꺾는 장면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한 줄기 시원한 봄비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한국 야구는 앞으로 일본 야구를 30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호언했던 이치로 선수가 자국의 패배가 확정된 뒤에 알듯 모를 듯한 욕설을 지껄이며 화나 있던 표정은, 우리의 승리에 더욱 자부심을 더해주는 느낌이었다. 아울러 일본과 미국을 연파하자, “'한국의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대국들만을 골라서 차례로 꺾은 것이 우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정부의 지시였는지 의혹이 일고 있다”는 한나라당 대변인의 블랙 코미디에, 정치만 잘 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네티즌들의 반응에 한 몫 거들고 싶은 마음이 꿀같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문득 연전에 겪은 일 한 가지가 생각나 밤늦도록 일본을 꺾은 뉴스로 잔치를 차리듯 하는 텔레비전을 껐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무한 경쟁으로 돌입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현대인의 출구 없는 욕망를 절묘하게 분석해 낸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라캉의 저서가 우리 나라에 변변하게 번역되어 있는 게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 이래 최대의 정신분석가 겸 사회 이론가로 평가받는 라캉이지만, 국내에는 얄팍한 편역서나 몇몇 연구자들이 간접적으로 정리해 들려주는 개설서 류의 책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어 번역서 몇 권을 잡고 씨름하던 필자는 일본에 유학중인 후배에게 혹시 일본어로 번역된 라캉의 저작들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에 라캉의 대표작인 [에크리]가 번역되었으며, 지금도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신간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1주일 안에도 출판사로 반품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서점에 진열조차 못해 보고 사라지기도 하는 우리 현실과 비교되어서 부러움과 함께 비감이 들었다.

요즈음 우리 서점에 가보면 이른바 처세술 서적 등 얄팍한 실용서들만 수두룩할 뿐, 인문과학 분야의 책들은 국내 저작이든 번역본이듯 좀처럼 찾기 어렵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아침형 인간], [메모의 기술] 등의 처세술 관련 서적은 대부분 일본 서적들의 번역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일본은 권모술수와 처세술만 발달한 나라로 오해받기 쉽지만, 구미 선진국에서 무게 있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저작이 출간되는 즉시 대부분 번역본으로 나올 만큼 정보에 민감할 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의 저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30여 년 전에 라캉의 일본어 번역본을 얻어 논문의 기둥을 세워가며, 일본은 경제 대국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우리가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면, 오락과 쾌락의 범람 속에서도 정신의 뼈대를 이루는 기초과학, 사회과학 서적류의 출판 등에 집요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투자하고 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일본 팀을 연파한 쾌거를 자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덩달아 박수를 칠 수 없었던 나는 헌책방으로 향했다. 일본은 서서히 불활에서 벗아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벌써 9년째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대비되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우리가 정신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에 우리 나라에서 발간된 신간 철학 서적이 고작 584종, 사회과학이 4,651종인데 비해, 일본의 경우에는 철학 3,735종, 사회과학 1,6002종을 발행하고 있다. 통계수치만으로도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지만,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실제 우리 서점에 가보면 집어들 만한 이 분야의 책이 너무 빈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강국이라는 표방의 이면에 가치 있는 컨텐츠가 너무 빈약하고, 또한 공공도서관의 서가는 텅텅 비어 있다. 한일전 야구의 승리는 값진 것이지만, 성급하게 일부 참가 선수들의 병역 면제를 거론할 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질적으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다지는 데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정치인들은 몇몇 운동선수들, 아닌 온 국민이 땀으로 거두어들인 성과를 서둘러 자기네들 것으로 돌리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공공 도서관 확충 등 국민의 정신적 자신을 늘리는 데 부심해야 할 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