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초상 : 박수근의 나무
시대의 초상 : 박수근의 나무
  • 배종민
  • 승인 2005.10.08 00:0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종민의 미술기행]
우리 근 · 현대회화의 거장 박수근

▲ <대화>(캔버스에 유채, 18.5*32.5cm, 1960년대) 지난 해 서울 노화랑에서 [20세기 7인의화가들](2004.4.21-4.30)을 주제로 한 전시가 있었다. 우리 근·현대 미술사를 빛낸 거장 7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 30여점을 선보인 기획전이었다. 이때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도상봉, 오지호, 이상범, 변관식이 7인의 화가로 선정되었다. 그중에서도 박수근(1914∼1965)이야말로 20세기 우리 회화사가 배출한 최고의 슈퍼스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에서 1950-60년대 서민들의 애환에 잠겨들곤 한다. 그의 작품의 두터운 마띠에르는 마치 화강암에 아로새긴 마애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박수근 작품의 특징은 그의 고단했던 삶과 부합되면서, 사후에 그는 민중의 삶에 대한 리얼리티를 가장 한국적인 조형언어로 표현한 20세기 최대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산골아이 ▲ <할아버지와 손자>(캔버스에 유채, 65*45.5cm,1960년대)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의 삼대 독자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집안(감리교)인 그의 가계는 농사와 상업을 겸업해서 다소 부유한 편이었다. 고향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던 박수근은 스물한 살 때 홀로 춘천으로 옮겨야했다. 연이은 부친의 사업실패와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집안의 파산 때문이었다. 이후 도시는 그의 삶터가 되었고, 그 대부분이 서울생활이었다. 박수근이 도시의 변두리 풍경을 즐겨 그린 이유이다.

1952년 무렵부터 박수근의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듬해부터 미8군PX에서 관광용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의 창신동 집은 이때의 수입으로 마련된 것이다. PX에 근무하면서 박수근은 평생의 후원자가 된 밀러부인을 만났고, 박완서의 소설 [나목]도 그 당시 박수근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박수근은 [우물가(집) ]이 특선, [노상 ]이 입선하였다. 제3회 국전에서도 [풍경]과 [절구]가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이은 국전입선에 자신감을 가진 박수근은 수입원이던 초상화 제작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시대상의 역설 - 나무

▲ <나무와 두 여인>(하드보드에 유채, 26*18cm, 1950년대) 박수근의 작품소재로 나무가 등장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그는 주로 도시의 변두리 길가에 서 있는 나무를 즐겨 그렸다. 아마도 미8군 PX와 반도호텔을 매일같이 오가는 길에서 보았던 나무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야만 했다. 따라서 서울에 아무런 연고조차 없던 그에게 도시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1953년 [귀로]에서부터 시작된 나무를 주제로 한 작품은 현재 유화43점과 수채화3점이 남아있다. 그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한결같은 나무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무를 통해 유년시절의 고향을 떠올리며 객지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을 것이다.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는 마을 어귀에 흔히 보이는 그런 나무들이다. 그것도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휑하니 가지만 앙상한 나무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는 나무의 생태와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기보다는, 화면구성에 변화를 주는 장치로서 나무라는 소재를 채용했던 것 같다. 박수근은 서로 모여 숲을 이루는 나무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단지 한그루이거나 기껏해야 서너 그루의 벌거벗은 채 서있는 나무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작품에서 나무는 명암이나 색채가 최소한으로 절제되어 있다. 푸석하고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마치 나무가 그림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 있거나 없다 해도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것이 그림자이다. 이것은 전후 서울의 스산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객지인 서울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박수근의 자화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들의 작품을 보면, 비록 그림자가 어떠한 현실적인 힘도 갖지 못하지만 결코 그림자 없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시대상의 역설로서 박수근의 나무가 읽히기도 한다. 서민의 화가 ▲ <책 읽는 여자아이>(하드보드에 유채, 21*13cm, 1950년대)
어린시절, 박수근은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였다. 그래서일까?박수근은 나무와 함께 도시의 변두리 소시민의 일상도 많이 그렸다.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들, 노상에서 좌판을 벌리거나 판자 집에서 빨래를 너는 아낙, 동생을 업고 부모를 기다리는 나이어린 누나의 모습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들은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작품을 기독교의 聖畵에 비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잔혹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박수근은 차분하고 담담한 붓질로 격변기의 상처를 그려냈다. 평범한 도시 변두리 소시민의 일상을 과장하지 않고 무심히 캔버스에 옮겼다. 그러하여 박수근은 서민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적으로 가장 잘 포착한 [서민의 화가 ]로 우리 현대미술사에 우뚝 서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나도 2005-10-14 18:31:10
엊그제 이중섭 화가의 위작 사기논란 의혹 텔레비전 보도보고 많이 관심이 가지는 글이었습니다

이혜숙 2005-10-11 09:36:07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 박수근에 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작품이 한 개인의 창작물이긴 하지만 그 시대와 사회의 생산물이기에 예술가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겠지요.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가 그림자 같지만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의 초상과 같다는 해석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