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의 삼대 독자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집안(감리교)인 그의 가계는 농사와 상업을 겸업해서 다소 부유한 편이었다. 고향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던 박수근은 스물한 살 때 홀로 춘천으로 옮겨야했다. 연이은 부친의 사업실패와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집안의 파산 때문이었다. 이후 도시는 그의 삶터가 되었고, 그 대부분이 서울생활이었다. 박수근이 도시의 변두리 풍경을 즐겨 그린 이유이다.
1952년 무렵부터 박수근의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듬해부터
미8군PX에서 관광용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의 창신동 집은 이때의 수입으로 마련된 것이다. PX에 근무하면서 박수근은 평생의
후원자가 된 밀러부인을 만났고, 박완서의 소설 [나목]도 그 당시 박수근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박수근은
[우물가(집) ]이 특선, [노상 ]이 입선하였다. 제3회 국전에서도 [풍경]과 [절구]가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이은 국전입선에 자신감을 가진 박수근은 수입원이던 초상화 제작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시대상의 역설 -
나무
어린시절, 박수근은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였다. 그래서일까?박수근은 나무와
함께 도시의 변두리 소시민의 일상도 많이 그렸다.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들, 노상에서 좌판을 벌리거나 판자 집에서
빨래를 너는 아낙, 동생을 업고 부모를 기다리는 나이어린 누나의 모습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들은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작품을 기독교의 聖畵에 비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잔혹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박수근은 차분하고 담담한 붓질로
격변기의 상처를 그려냈다. 평범한 도시 변두리 소시민의 일상을 과장하지 않고 무심히 캔버스에 옮겼다. 그러하여 박수근은 서민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적으로 가장 잘 포착한 [서민의 화가 ]로 우리 현대미술사에 우뚝 서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 박수근에 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작품이 한 개인의 창작물이긴 하지만 그 시대와 사회의 생산물이기에 예술가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겠지요.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가 그림자 같지만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의 초상과 같다는 해석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