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속에 담긴 시대의 표정
장승 속에 담긴 시대의 표정
  • 배종민
  • 승인 2005.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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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고향 전라도
전라도는 전국에서도 장승이 가장 많은 곳이다. 전남에는 54개 지역에 돌장승 37기, 목장승 17기가 남아 있으며, 전북에서도 돌장승 15기, 목장승 4기가 남아 있다. 전국에서 장승이 확인된 지역이 167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전라도를 장승의 고향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각 시대별로 대표적인 장승을 살펴보면,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장생탑비, 전북 익산군 동고도리(東古都里)의 수구막이, 영암 월출산 기슭의 국장생- 황장생, 남원 만복사지의 석장승 등은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에 세워진 장승들이다.

조선시대에는 남원 실상사(實相寺) 돌벅수, 나주 운흥사(雲興寺) - 불회사(佛會寺)의 돌벅수, 무안 법천사(法泉寺)의 돌벅수, 해남 대흥사(大興寺), 승주 선암사(仙巖寺)의 목제 호법신장(護法神將) 등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표정의 장승


▲ 장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얼굴 표정이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과 주먹코, 삐진 송곳니와 모자 등이 친숙해진 장승의 전형이다. 그렇지만 더 자세하게 장승을 살펴보면 제작된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표정의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사진 왼쪽부터 전남 보성 득량면 해평리 하원주장군, 무안 법천사 석장승, 보성 해평리 상원당장군, 영암 죽정리 국장승 ⓒ배종민 장승은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과 모습을 변형시켜 세운 수호신상의 상징물이다. 그 기원은 선돌과 솟대, 神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같은 상징물들은 제정일치 시대에 씨족이나 부족의 신앙과 지배의 표상으로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후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불교가 수용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장승의 형태로 변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승 속에는 가장 오랜 우리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하겠다.장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얼굴표정이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과 주먹코, 삐진 송곳니와 모자 등이 친숙해진 장승의 전형이다. 그렇지만 더 자세하게 장승을 살펴보면 제작된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표정의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월출산의 국장생처럼 화강암에 얼굴을 표현하지 않고 문자만 새긴 유형이 있는가하면, 남원 실상사 진입로에 있는 장승은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큼직한 왕방울 눈에 주먹코와 송곳니 등이 마치 당당한 장수처럼 여겨진다. 또한 전북 부안과 정읍, 전남 장흥군 방촌리 벅수와 무안의 당산 벅수처럼 순박한 시골 노인과 같은 얼굴을 한 장승도 있다. 장승의 다양한 역할 장승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가운데 하나가 풍수비보(風水裨補)의 개념이다. 마을에서 지맥(地脈)이나 수구(水口)가 허한 곳을 보충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적절한 위치에 비보장승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양산 통도사와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까지 그 유래가 깊다. 대표적인 비보장승으로 전북 익산 동고도리의 수구막이, 남원 운봉(雲峰)의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방어대장군 벅수, 순창읍 충신리(忠信里)와 남계리의 돌벅수, 전남 여수, 여천의 화정여(火正黎)-남정중(南正重) 문자 벅수, 광주 동문밖 보호동맥(補護東脈)-와주성선(蝸柱成仙) 등을 들 수 있다.한편, 전통시대에 천연두나 역질 등의 전염병은 민중들에게 매우 두려운 재앙이었다. 사람들은 마을의 입구나 성문에 ‘성문벅수’를 세워 전염병을 가져오는 호귀(胡鬼)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성문벅수의 사례로는 전북 부안의 서문안 당산, 전남 장성과 강진 병영성의 서문밖 돌벅수, 장흥 관산 북문밖 돌벅수, 보성 해평(海坪) 벅수 등이 있다. 이외에도 장승은 마을제사의 신체(神體)가 되기도 하였는데, 여수와 여천의 돌벅수, 진도 덕병(德柄)의 대장군-진상등(鎭桑燈), 장성 와우리의 한글 장승 등 현재 약 20여 기가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장승의 역할 가운데 흥미로운 또 하나는 성신앙과 관련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흔적은 이미 선사시대의 암각화에서 찾아진다. 경남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동물들이 교미(交尾)하는 모습과 두 팔을 올려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성기를 노출한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안전을 기원하는 수렵의식과 함께 생산과 번식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삼한시대의 신성구역으로 알려진 소도(蘇塗)를 수터, 즉 남성의 터로 보고 거기에 세운 나무장대(立大木)를 목재남근(木材男根)의 상징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으며, 신라토기에 장식된 토우인형에서도 다양한 성적모티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기숭배사상은 농경사회에서 필요로 하였던 생산력에 대한 갈구에 그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내려오면서 차츰 남녀의 성기에서 남근중심의 기자사상(祈子思想)으로 변모하였고 여기에 장승이 매우 유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에 우뚝 솟은 장승을 보면서 남근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 전남 보성군 해평리 석장승과 당산나무 전경 ⓒ배종민

대학가의 시국장승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는 ‘민주대장군’ 등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새겨진 장승이 세워졌다. 이후‘민족통일대장군’,‘백두대장군’,‘자주여장군’,‘반전반핵대장군’ 등이 만들어져서 정치활동(?)을 개시하였고, 그 영역도 학내민주화에서부터 노동, 교육, 환경, 문화, 통일, 남녀평등, 반미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갔다.

더불어‘통일기원굿’,‘길놀이굿’,‘장승맞이대동풀이굿’ 등 각종 장승굿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통시대의 장승이 청년들에 의하여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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