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칼럼] 이 땅에서 졸(卒)로 살기
[정지아칼럼] 이 땅에서 졸(卒)로 살기
  • 정지아
  • 승인 2005.02.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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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정지아
어린 시절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제목은 잊었다. 여간첩 김수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었다. 마타하리가 누군지도 모를 때 나는 김수임을 한국의 마타하리로 처음 알았다. 며칠 전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녀에 관해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김수임의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는 장기판의 졸(卒)이었을 뿐이라고, 권력에 의해 한낱 졸로 버려진 사람들이 어디 우리 어머니뿐이겠냐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년만인지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울었다.

묵은 기억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 친구 국원이. 국원이가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국원이 아버지의 소원은 단 하나, 학생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잃은 국원이 아버지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80년대 초반 최루탄이 난무하는 캠퍼스에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나가기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공부에만 묻혀 살던, 아버지의 소망을 위해 데모 한 번 하지 않았던 국원이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사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자식의 보상금에 손 한 번 대지 않은 국원이의 어머니는 요즘 봉사활동으로 시간을 잊고 있단다.

국원이뿐이랴. 교사였던 고향의 어떤 분은 북한을 무슨 도깨비 나라쯤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북한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고, 지하철도 있다는 한 마디를 했다가 곧장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네 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허름한 한옥집에서 살던 이들은 어느 날 연탄가스가 새는 바람에 아이들 둘만 살아남았다.

그때 살아남은 큰 아이는 지금쯤 삼십대가 되었을 것이고, 가슴에 쌓인 슬픔이 아직도 그녀의 생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한낱 졸로 보고 마음대로 내팽개친 졸들의 삶은 지난 날 이러했다.

졸을 바꿔 말하면 민중이요, 시민이리라. 혹은 국민이라고 해도 좋다. 뭐라 부르든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름 없는 이 졸들은 세상의 근본이다. 임금을 위해 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임금이 존재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왕은 자기 연회에 참석하는 유명인사들에게 전차를 타도록 한다. 화려한 파티복을 입은 채 전차나 버스를 타고 왕궁에 도착한 내노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감격했다. 이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졸들의 교통편의를 위해서다.

이런 나라에서 졸이 김수임처럼, 내 친구 국원이처럼 내팽개쳐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졸은 마땅히 이렇게 대접받아야 한다. 왜냐면 권력은 졸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에 의해 죽음으로, 혹은 파탄으로 내몰린 졸들의 불행은 따지고 보면 절반쯤은 우리 남은 졸들의 책임이다. 우리의 힘을 우리 스스로 알지 못했으므로, 그리하여 방관했으므로.


“시민의 소리”는 그런 졸들의 소리이다. 졸들이 자신들의 힘을 스스로 깨닫고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창간 네 돌을 맞은 “시민의 소리”가 우뚝 서서 제발 이 땅에서 졸로 살아가는 일이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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