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글 쓸 줄 몰러!"
"나, 글 쓸 줄 몰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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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승 고흥농민

한동안 농촌의 여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건강교실을 열면서 열심히 자료집도 만들고 교육용차트도 만들고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의 강의도 해 보았다.

누군가 말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엄마들중에 글 모르는 분들이 많을거야, 그런 자료집보다 한글교실이 더 먼저가 아닐까?"
"정말 글을 모르는 분들이 많이 계실까? 아마 60대이상에서는 있겠다. 하지만 창피해서 나오시지 않을지도 모르지!"

반신반의하면서도 한번 일을 벌여 보자고 마음먹고 학생모집에 나섰다. 주춤주춤 문을 두드린 분이 7명, 그중에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엄마도 있었다.

"창피해서 한참 망설였지만 여즉 이런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더 안달이 나서, 지금이 아니면 정말 글을 배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생겨 오게 되었다." 한다.

조금씩 읽을 수는 있되 쓸수 없는 안타까움, 아예 글이라고는 모르는 답답함, 그것은 글을 깨치지 못한 모든 분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한달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이 나고, 한글학교 학생들이 주변의 친구들을 설득하면서 급기야 한글학교 학생이 40여명을 넘어섰다.

‘너무 늦었어! 아무리 해도 머리속에 글자가 남아야지, 정말 아쉽다. 젊은 것들마냥 기억력이 있어야 할텐데...’ 하며 안타까움을 머금고 스스로 포기하는 엄마들도 몇몇 생겨났고, ‘내 평생에 이런 기회는 없었네. 이 참에 반드시 배워야 쓰것어, 지금을 놓치면 정녕 글하고는 멀어질 참이야. 나는 농번기에도 나올 작정을 하고 있응게 그리 알어.’라고 각오를 다지시는 엄마들도 생겨났다.

대소롭지 않게 시작의 문을 열었으되 결코 마무리가 가벼울 수 없는 한글학교의 존재이유다.

그리고 되짚어본다. 우리가 마을로 찾아다니며 교육용 자료라고 내놓았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를...

요즘 디지털문화가 기억력을 앗아간다고 한다.
핸드폰에 전화번호 입력, 노래방에서 가사보고 부르기등 디지털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기억력을 저당잡히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기억하려 애쓰지 않다보니 실제 핸드폰을 분실하거나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외울 수 있는 전화번호가 없고 혼자서 읊조릴 노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디지털이 무엇인지 컴퓨터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지만 마을잔치때만 되면 열곡이 넘는 숱한 노래들을 가사하나 안틀리고 불러제낄 수 있는 엄마들의 열정이 있다. 귀동냥을 얻어 듣고 외운 노랫말에 엄마들의 회한이 묻어난다. 부녀회장을 뽑는 회의가 있는 연말이면 엄마들속에서 으레 나오는 말이 있다."부녀회장은 글을 쓸 줄 몰라도 할 수 있어. 이야기 하는 것 잘 듣고 옳게만 전달해주면 된당게."

사리분별 똑부러지고 마을대동회때면 궂은 일 마다않고 해내는 일꾼들이 단지 글을 쓸 수 없는 처지라 선뜩 마을책임자가 될 수 없는 것이 21세기 농촌의 또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그 오랜 시절을 배가 고파서, 동생 키우다 보니, 여자라서 배움의 기회를 놓쳐버린 엄마들이 또다른 삶을 위해 앙다문 각오가 새해에는 보다 따뜻하게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이 해 승 고흥농민 riselh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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