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블러디 선데이' 광주에서 보게 된다
[영화]'블러디 선데이' 광주에서 보게 된다
  • 이광재 기자
  • 승인 2004.07.0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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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극장 화씨9/11 상영 이후 ...8월 중순께 상영키로 확정

'80년 광주같았다'
북아일랜드의 민간인 살상 사건을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 '블러디선데이(감독 폴 그린그래스, 2002년, 110분)'에 대한 한 신문의 평이다.

▲ 영화 블러디선데이 포스터 이 작품은 1972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의 데리 시에서 벌어진 영국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발포사건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다룬 영화다.때문에 이 영화를 수입배급한 (주)영화사 백두대간(대표 이광모)측은 아예 드러내놓고 '광주와 유사성'에 초점을 맞춰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6월18일 서울 씨네큐브 등 2개관에서 개봉한 이후 지역으로 개봉이 확대되진 않았다. 예술영화로 분류된 이 영화가 상업성이 있느냐가 각 극장주들의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개봉한지 20일가량이 지난 8일 현재 서울에선 예술전용극장 씨네큐브 단 한곳에서만 상영중. (주)백두대관측은 지난 5일 "예술영화로 분류되다보니 상업성이 주요 관심사인 각 극장들이 개봉을 꺼리고 있다"면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광주쪽에서도 얘기가 있을 법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고 전했다. 그런데 다행히 이튿날 광주극장은 이 영화를 오는 8월 상영키로 배급사측과 최종 합의했다고 밝혔다.광주극장 김형수 이사는 "오는 22일 개봉키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 끝나는 대로 8월13일이나 20일쯤 상영하기로 6일 백두대간측과 합의를 마쳤다"고 전했다. 김이사는 이어 "아무리 좋은 영화라 할지라도 극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필름을 가져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서울과 개봉일의 차이가 다소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과 광주의 역사성 등을 고려해 상영키로 결정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광주극장 홈페이지에는 6월18일 이 영화의 서울개봉에 즈음해 "블러디 선데이를 광주극장에서 볼 순 없느냐"는 네티즌의 요청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영화는 앞서 지난 5월, 5.18기념행사 주간에도 광주에서 상영 될뻔했다. 상무지구 5.18기념공원에서 영화제를 준비했던 광주민예총 영상분과에서 '선택', '송환'과 함께 5월광주를 다시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 영화의 상영을 기획했던 것.그러나 당시 배급사측과 행사위측의 사정이 서로 맞지 않아 결국 상영에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블러디 선데이'가 광주에서 전혀 상영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 4월 19일 광주롯데시네마에서 시사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극장관계자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 관객의 관심과 관람률은 극히 낮았다. 한편, 오는 9월2일 시작될 광주국제영화제에서도 이 작품 상영이 검토되고 있다. 영화제 관계자는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데 상영예정작품에 '블러디선데이'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아직 최종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영화 블러디 선데이 한 장면2
왜 광주에서 상영돼야 하나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광주상영이 가진 의미는 적지 않다. 우선 사건 자체로만 볼 때,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과 이어진 민간인 학살이 24년 전 광주와 32년 전 북아일랜드 데리시의 그것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제작돼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학살의 진실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5월광주가 가진 과제와 맥이 닿아 있다.
그렇다고 정치적 이유만으로 이 영화의 광주상영 필요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2년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과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판타스포르토영화제의 관객상, 감독주간 부문 남우주연상, 작품상 수상등의 경력이 이 작품의 '품질'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달리 예술영화이기에 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광주에서 이 만한 영화를 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하나도 낯설지 않다.


블러디선데이는 어떤 영화?영화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합작품이다. 1972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의 테리에서 시민권 요구 시위를 하던 비무장 시민들에게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 13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한 사건 하루 전체를 담고 있다. 이후 '블러디 선데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사고, 그 후 25년에 걸친 극단적 갈등의 전환점이 되었다.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17세 청년 제리(디클란 더디)가 신교도 여자 친구 헤스더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구교도인 데리시의 주민들은 영국 정부의 불법 억류에 반대하고 시민권을 주장하기 위해 평화 행진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영국군은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탱크를 배치하는 등 거리를 봉쇄한다. 이튿날 데리시민권협의회 대표이자 영국의회 하원의원인 아이반 쿠퍼(제임스 네스빗)는 시민 행렬을 이끌고 데리 시내를 행진한다. 그러나 제리를 포함한 일부 청년들은 대열에서 이탈하고, 영국군이 이를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가 이뤄진다. 영국과 북아일랜드 ▲ 영국과 아일랜드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thern Ireland'. 영국의 공식명칭이다. 이처럼 영국은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섬과 그 서남쪽에 있는 아일랜드섬의 일부인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나라다.

1801년부터 영국의 속국이 됐던 아일랜드는 1921년 독립하지만, 신교도들이 많 이거주하는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관할하에 남겨 진다. 이는 앞서 영국이 전통적인 구교 국가인 아일랜드의 북아일랜드 지역에 신교도들을 정책적으로 대거 이주시킨 탓이었다. 결국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북아일랜드분쟁'은 신구교도들간 종교전쟁의 성격을 띤다. .

1968년 이래 카톨릭교도에 대한 영국의 차별에 항의하는 카톨릭계의 민권운동이 시작되었고, 1969년부터는 '통일 아일랜드 공화국 건설'을 부르짖는 무장단체 IRA(아일랜드공화군)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북아일랜드 신교도계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IRA에 대항하였고 양측은 잦은 충돌을 빚었다. 

특히 영국은 1972년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회수함으로써 아일랜드인들의 유혈 폭력 운동을 고조시켰으며, 소위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 불리는 유혈사태도 이 과정에서 발생했다. 영국정부군의 시위대를 향한 발포 이후 양측의 테러로 30년간 약 3천2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기록됐다.
북아일랜드는 지금도 게엄과 같은 상황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영국군들이 치안을 맡고 있으며, 영국의 입장에선 가장 오래되고 어려운 정치적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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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2004-07-13 21:25:57
광주에서 보게된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굿뉴스 전해주셔서 감사함다. ^^
광주극장도 화이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