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미국
대중음악에 관한 몇 권의 책, 그리고 케이블TV에 방영된 ‘락음악, 그 60년대와 70년대’, 5년전 쯤 교육방송 라디오 특집 임진모와 강헌의
‘대중음악사회사’를 녹음한 30개 테이프, 작년 봄쯤에 Q채널에서 방영한 BBC 8부작 특집 ‘팝100년사’를 녹화한 비디오가 있다. 이걸 거듭
보고 들으면서, 블루스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블루스의 뿌리’가
궁금했다. 막연하게 미루고 있던 차에, [부에나비스타 쏘셜클럽]의 감독 빔 벤더스이 또 다시 그렇게 만든 음악영화 [블루스, 소울 오브 맨]이
상영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택시 드라이버]의 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하고 지휘하여 만든 7부작 다큐멘터리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으며, 그 7부작이 모두 아마 8월 말쯤부터 교육방송에서 방영될 예정이라 걸 듣고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야호!!!” 교육방송은 항상
너무너무 고맙다. 공짜로 금싸라기 같은 보물을 줍는 이런 기쁨을 그 무엇에 비기리오.
우리의 대중음악은 미국의 대중음악의 껍데기만 흉내내어 우리 그 시절의 어떤 감성에 맞추어 변형된 것이다. “백고가 불여 일부라고, 백 번
고고 추어봤자 한 번 블루스 춤만 못하다”는 내 스무살 시절의 명언이 있다. 미국 남부의 블루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끈끈척척하게 유혹하는
‘장미빛 스카프’의 진하게 늘어지는 색소폰 소리”하고는 사뭇 다르다. 삶의 설움이 배인 흑인 영가에 목화밭의 땀내나는 고달픔이 새겨지고 맺혀서
새어 나온 신음소리이다. 고된 일을 잊으려거나 한 숨 돌리는 틈에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꺼나 집어들고 두들기고 긁으며 그냥 매갑시 그렇게
뽑아보는 한 가락이었다. 비록 곡조는 다르지만, 문득 채정례 할머니의 ‘진도 씻김굿’하고 울 엄니의 ‘타향살이’가 떠올랐다. 전문가의 닳고 닳다
발랑 까지기도 하는 그런 솜씨하고는 전혀 다르다. 그 발성이 귀에 설어서 가슴을 파고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삶을 새기면서 듣고 또
들어보니 그 슬픔이 점점 적셔들어온다. 느리게 슬픈 블루스가 도시로 가고 새 시대를 맞이하며 빨라진 리듬 앤 블루스로 변하거나 6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만나면서, 그 소박함과 처연함이 사려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