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네가 사는 법
부루네가 사는 법
  • 이광재 기자
  • 승인 2004.05.29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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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에서 차밭을 일구며 '웰빙'하는 부루다원 식구들

▲ 전남함평군 대동면 서호리 조용한 산아랫마을에 부루네 네식구가 산다. ⓒ이광재 기자 함평의 웰빙족(well-being族) "일 하고 싶을 땐 몸이 좋아할 만큼만 일을 하고, 쉬고 싶을 땐 쉰다. 운동하고 싶으면 언제든 운동을 하고, 공부하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먹는 음식 재료는 대부분 텃밭에서 나오기 때문에 농약 걱정이 없다. 돈은 필요한 만큼만 적게 벌고 적게 쓴다. 모든 게 서두를 일 없다."이만하면 '잘 먹고 잘 사는' 삶이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웰빙(well-being)'이다. 이런 삶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겠지만, 부루네 가족에겐 지금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전남 함평군 대동면 서호리 성정마을. 부루네집을 포함해 모두 세 가구가 전부인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부루네 가족은 황토집을 짓고 '부루다원'이라는 차밭을 일구며 6년째 살고 있다. 다섯살배기 부루와 내일모레면 돌잔치를 벌일 동생 부소, 그리고 아빠 '하늘빛(38. 본명 전명호)'과 엄마 '맑은땅(31.본명 배유림)' 이렇게 네 식구가, 일과 놀이의 구분이 불분명한 '재밌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빠져 산다. 200평쯤 되는 너른 집터엔 그에 걸맞는 마당과 두개의 텃밭이 있고, 그 곳에는 상추와 고추, 완두콩, 적치커리, 마늘, 참나물 등 갖가지 채소들이 사이좋게 자란다. 그 틈바구니에선 둥굴레차와 이름도 생소한 약초도 보인다. 최근 한 달 동안은 차 만드는 일에 바쁘기도 했지만, 부루네가 평상시 이곳에서 하는 일은 집 뒤로 이어진 야산에 차밭을 가꾸는 일과 집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빠 하늘빛은 부루네 살림채를 비롯해 벌써 건물 세 동을 손수 지었다. 직접 온돌을 놓고 황토로 바닥을 깔아 군불을 지피는 살림채나 차를 만들기 위해 지은 다실(茶室)도 멋지지만, 친환경 시설을 갖춘 화장실은 이 집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 하늘빛이 손수 지은 '친환경적 화장실'. 물론 '푸세식'이지만 냄새 안나고 생태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한 하늘빛의 고민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광재 기자
"집 짓는 일은 참 재밌어요. 설계단계부터 재료를 구하고 직접 지어 올리는 과정 하나하나가 내 생각과 땀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지요. 재료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제작 일정이 변하다보니, 저 화장실도 처음 구상과는 많이 달라진 거죠."

정해진 완공 기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쫓길 일정이 없으니 오늘 못하면 내일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 재료는 사들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딘가에 쓸만한 재목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모아온 것들이다.

단전호흡 지도자에서 농사꾼으로

젊은 나이에 귀농을 한 사람들이 부루네 가족만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귀농 사연은 지금 사는 모습만큼이나 남다른 점이 있다.
하늘빛과 맑은땅이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이곳 함평으로 귀농한 것은 지난 99년. 대학시절부터 각기 단전호흡 운동을 해왔던 두 사람은 미국에서 지도자생활을 하면서 이른바 '눈이 맞았다'.

'하늘빛'과 '맑은땅'이라는 이름은 이들의 한자이름을 한글식으로 풀어쓴 것이다. 이름은 두 사람 뿐아니라 이들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부른다.


▲ 하늘빛 하늘빛은 원래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공부하는 모임에 참가했다. 큰 아이 '부루'나 둘째 '부소'의 이름이 모두 고조선 상고사에 기록된 2대 단군 형제의 이름과 같은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몸이 좋지 않이 시작한 운동이 이국땅에 지도자 생활을 하게 했고, 그것이 맑은땅과의 인연까지 이어지게 된 것. 맑은땅은 소위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에서 의류학을 ▲ 맑은땅

공부했다.
하지만 올해부턴 목포대학 대학원에서 국제차문화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위한 공부보다는, 대학에서 배우는 게 차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고 있지요. 학부 때 전공에 대해선 미련 없어요." 

이국땅에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고국에 돌아와 조용한 곳에서 운동에만 전념하기로 의기투합에 이르렀다. 그리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이곳까지 찾아든 것.   

함평에 들어온 뒤 둘이서 1년을 살아보니 생활비가 꼭 200만원 들었단다. 그 정도 벌이만 하면, 하고 싶은 공부나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작물을 생각했다. 약초재배 등 몇가지를 놓고 고민하다 하늘빛이 오래전부터 마셔온 차로 결정했다. 그리곤 차를 만드는 곳을 찾아다니고 옛문헌을 뒤지며 전통의 제다법을 익혔다.

▲ 마당 텃밭에 선 하늘빛 ⓒ이광재 기자 이듬해 지금의 집 뒤편 임야 2000평을 몇 사람과 함께 사들여 차밭으로 일구기 시작했다. 뒷돈은 하늘빛이 아버님께 조금 꿨단다. 부루네가 이곳에 오기까진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이에 대해 하늘빛은 웃으며 간단히 답했다. "특별히 가진 게 없었어요. 가진게 많으면 버려야 할 것도 많은데 우리에겐 별루 버릴 것도 없었지요." 그러고 보면 이들은 함평에 들어옴으로써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됐다. 두 아들이 생겼고, 살 집을 지었으며, 노동할 차밭을 마련했으니말이다. 귀농의 삶에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하늘빛은 서슴없이 '여유'란다. '부루다원(夫樓茶園)' 함평에 들어와 차밭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는 인근에 옛부터 자라온 야생차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늘빛과 맑은땅은 야생차를 따기 시작했다. 지금 부루다원에서 만드는 차는 이들의 차밭에서 유기농 무농약으로 자연재배한 차와 함평의 폐사지와 야산에서 따온 야생차가 반반쯤된다. 기자가 부루다원을 찾은 지난 24일은 올들어 마지막 차를 만드는 날이었다. 절기상 곡우(4월20일)를 전후해 따는 차가 가장 좋고 그 뒤에 따는 차는 맛과 향이 떨어지는데, 차나무도 성장을 해야 하기에 이날까지 찻잎을 따는 것으로 올해 제다작업을 마치기로 했단다. 차는 차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곡우前)-세작-중작 등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발효 정도에 따라 녹차-황차-홍차로 나뉜다. 부루다원에서 만드는 차는 황차와 녹차인데 이들은 각각 야생차와 재배차에 따라 다시 종류가 갈린다. 특히 '부루황차-야생'은 맛이 부드럽고 황금빛이 도는 것으로 부루다원의 자랑이다.차가 부루네의 주요 수입원인만큼 판로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며, 맛소문을 듣고 이들의 홈페이지(www.dadochon.com)를 통해 주문 해오기도 한다. 일부는 생필품과 교환하하기도 한단다. ▲ 부부는 부루다원 차밭에서 차를 따는 모습(위), 차덖기(왼쪽), 차비비기(오른쪽)
이날 아침 차밭에서 따온 찻잎들은 부루네 다실에서 하늘빛과 맑은땅, 그리고 제다법을 배우러 온 이웃의 손에서 비벼지고 차솥에서 덖어지고 말려지고 있었다. 부루녹차의 경우, 찻잎을 딴 뒤 모두 여섯번을 비비고, 세 번을 덖은 뒤 말리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녹차의 맛은 얼마나 적당한 온도로 덖느냐에 달려 있지요." 차 만드는 과정을 처음 본 사람의 눈에는 차를 비비는 이유도 궁금하다.  "모양을 좋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찻잎 표피의 세포막을 터뜨림으로써 차의 맛과 성분이 잘 우러나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게 맑은땅의 설명이다. 

부루다원은 이들 부부에게 미래이기도 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활공동체를 만들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늘빛은 그동안의 여러 생활공동체들의 패인이 당대에 실현하려는 욕심때문이라고 진단했다.

▲ 부루다원은 하늘빛과 맑은땅이 꿈꾸는 생태적 삶을 복원하기 위한 토대다. 이는 두 아이 부루(오른편)와 부소(왼편)의 미래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이광재 기자 "지금 세상에서 우리는 오염된 세대예요. 부루 세대는 절반쯤 오염된 세대겠지요. 하지만 사심을 버리고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수련을 통해 몇 세대를 거친다면 생태적 삶이 복원될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토대만 만드는 거지요."부루네는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집터 한 켠에 새집을 지을 계획이다. 이곳에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 수련도 하고 함께 살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서두르진 않을 작정이다. 완성까지는 넉넉히 10년을 보고 있다. 하늘빛에게는 이미 10년치 일감이 예정된 셈이다. 물론 이 사회에서 생태적 삶의 걸림돌은 ‘돈’이다. 그래서 이들은 '과하지 않은, 적당한' 수입선을 정해놓고 차의 생산량을 제한하고 있다. 차잎을 더 많이 따고 더 많이 비비면 그만큼 수익을 늘지만, 이는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차 생산량 제한은 차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결국 '여유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부루네의 지향과도 맞기 때문이다. 부루네 가족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 끝에 불쑥 '왜 사느냐' 물었다. "사람에게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란 건 없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해야 할 일도,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없는 게 삶입니다. 그래서 쫓기는 삶이 옳지 않은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생태적 삶이 본래 모습인 거죠."하늘빛의 답에 대해 맑은땅은 “하늘빛이 살아오며 얻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얘기"라고 거들었다. 그러고보면 '함께 차 한잔 합시다'는 말이 불가에서 법어로 쓰일 때 '깨달음'과 같은 화두로 이용됐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 밤이되자 낮동안 집과 차밭을 오가며 뛰어놀던 부루는 잠이 들었고, 부루 엄마 아빠와 부루의 동생 부소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이광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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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2004-06-08 12:09:22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한 스님의 차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사는 동네가 비슷한것 같군요.
혹 같이 사시는지

단군이라 2004-06-03 08:47:30
뭐,종교단체는 아닌 것 같은데
나오는 얘기는 불교스럽기도 하고 단군종교스럽기도 하네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서인지...

차사랑 2004-06-01 19:19:04
요즘 각 자치단체마다 녹차 심는다고 야단이다.
어디서 뭐가 잘 된다더라 하면 너도나도 심어대는 모양을 보면 지역경제살리기가 아니라, 결국 모두 함께 죽기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내가 알기로 함평은 고려때부터 절을 중심으로 차를 심었다고 한다. 부루네가 사는 곳이 성정마을이면, 과거 성정사라는 절이 있었던 그 곳인가보다.
전통을 살리고 지키는 모습도 좋거니와, 무엇보다 세상 도는 데 쫓기지 않는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

부럽네 2004-06-01 19:12:23
도시에 살면서 늘 꿈꾸어온 삶이다. 오늘에 오기까지 그들의 고민이나 과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역시 내겐 적잖이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 역시 언젠가는 부루네처럼 그런 삶을 살 생각이다.
어느 정도 맘이 기울면, 그땐 부루네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가면 차 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