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식’으로 가지 못한 ‘추모제’
‘기념식’으로 가지 못한 ‘추모제’
  • 이광재 기자
  • 승인 2004.05.29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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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동우회 등 윤상원, 박용준 열사 추모행사 가져

“그날 충격이 강렬해 아직도 추모단계 계속돼”
항쟁 당사자 의식 속에 5.18의 과제 여전히 뚜렷

▲ 들불야학 동우회원 30여명은 26일 항쟁 마지막날 산화한 윤상원 열사와 박용준 열사의 묘소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진 뒤 서로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이광재 기자 지난 26일 오전 11시 국립5.18묘지. 80년 5월 항쟁의 마지막날 산화한 두 열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30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다. 도청 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잘 알려진 윤상원 열사와 그의 야학 동료이자 항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했던 박용준 열사. 이젠 역사로 남은 이들의 묘비 앞에 당시 야학활동을 같이 했던 동우들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여 든 것.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게 매년 이맘때 열사들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져왔다. 24년 전 20대 열혈 청년이었던 이들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뱃살도 제법 묵직해졌다.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함께한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로 지인들을 중심으로 치러지는 추모행사가 과연 아이들의 세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추모는 ‘기념’ 이전에 주로 기억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지요. 사건의 충격이 워낙 강렬했던 5.18의 경우 추모단계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있구요. 아마 우리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될 겁니다.”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은 열사들이 산화한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추모’단계가 계속되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또한 당시 항쟁을 함께 했던 이들이 젊었고, 지금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점도 이 자리가 추모행사로 계속되는 이유의 하나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가까이는 1년 만에, 멀게는 10여년 만에 열사들을 통해 산 사람들이 다시 만났다. 거의 10년 만에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김종태씨(48. 서울). 당시 윤상원 열사와 함께 극단 광대의 회원이었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홍보활동을 하며 항쟁의 거리를 누볐다. “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아직도 바로 잡아야할 역사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일파의 역사도 청산해야 하고, 한국전쟁 중 벌어진 양민학살이나 4.3항쟁도 그렇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5.18 역시 피해자의 진실과 함께 가해자의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 88년 5월청문회 때에 항쟁을 증언하기도 했던 그는, 여전히 밝혀지지 못한 진실에 목말라 있었다. 붙잡을 수밖에 없는 5월의 기억들.... 5.18의 기념사업화와 명예회복으로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지만, 당시 현장을 겪었던 사람들의 눈에는 5.18의 과제들이 뚜렷하기만 했다. 이들은 스스로가 당시 항쟁의 한 장면 한 장면이자 역사의 한 부분과도 같다. 때문에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가 퍼즐조각 맞추는 것처럼 항쟁의 역사를 맞추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서 인지, 이날 추모행사가 끝난 뒤 누군가의 제안으로 기념촬영도 했다. 시간과 함께 하나둘 흐려질 그날의 기억들을 붙잡아 두려는 듯.그들이 붙잡고 싶어했던, 아니 떠나보낼 수 없었던 기억에는 이날 이들이 찾았던 두 열사에 대한 기억도 포함돼 있었다. 5월 항쟁을 꽃피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들불야학출신 7명의 열사들이 있다. 사망일자는 각각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길지 않은 삶은 항쟁의 싹을 틔웠고, 불을 지폈으며, 진실을 알리는 것으로 관통했다. 박기순(1957∼1978), 윤상원(1950∼1980), 박용준(1956∼1980), 박관현(1953∼1982), 신영일(1958∼1988), 김영철(1948∼1998), 박효선(1954∼1998) 등이다. 이들 가운데 오월항쟁의 마지막날 함께 산화한 이들이 윤상원 열사와 박용준 열사다. 윤상원 열사는 대학졸업 후 잠시 직장생활도 했으나 광천동의 한 공장의 노동자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지역주민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항쟁을 맞았다. 들불야학 강학, 학생들과 ‘투사회보’를 만들었고, 마지막 도청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으로 활약,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했다. 고아였던 박용준 열사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도 공부를 계속하며, 78년YWCA신협에서 근무하면서 광천동 주민운동에 참가,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항쟁 당시 들불야학팀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할 때 필경을 도맡아 했다. 그 역시 항쟁 마지막날 YWCA에서 시민군으로서의 최후를 맞았다. /이광재 기자 ▲ 윤상원추모제 ⓒ이광재 기자


   
▲ 윤상원추모제 ⓒ이광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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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 2004-06-02 13:29:56
상원이형!

그 다정다감했던 형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