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엔 그녀들이 있었다
80년 5월엔 그녀들이 있었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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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트전기 조합원 등 여성 10여명 5·18 관련 집단보상 신청
   
▲ 완강하게 버티던 이들 여성들은 지도부의 간곡한 요청에 고개를 떨구고 신 새벽 여명을 밟으며 도청의 담벼락을 넘었다.ⓒ김태성 기자
1980년 5월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광주시 외곽에서부터 전남도청을 향해 바퀴벌레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 도청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하염없는 눈물의 바다에 젖어 들었다.

항쟁지도부가 계엄군의 진입을 앞두고 여성과 고교생들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일부 가담자들이 한사코 항쟁지도부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버티는 통에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됐다. 그 가운데에는 앳된 모습의 여고생 2명을 포함한 15명의 여성들도 포함돼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광주시민 모두가 죽는 날이다. 여기서 죽으나 바깥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완강하게 버티던 이들 여성들은 결국 지도부의 간곡한 요청에 고개를 떨구고 신 새벽 여명을 밟으며 도청의 담벼락을 넘었다.

1980년 5·18 항쟁기간 동안 도청과 가톨릭센터, YWCA를 오가며 각종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던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보상 신청에 나선다.

이정희, 윤청자, 김순희, 최정림, 마복님씨 등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5명의 아줌마가 그 주인공들. 이들은 집단 보상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지난 19일 광주 금남로 삼호빌딩에 위치한 광주미래연구소에서 모처럼 얼굴을 맞댔다. 이 자리에는 이들을 ‘도청 취사조’로 이끌었던 이윤정 전 광주시의원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중 윤청자, 김순희, 최정림씨는 로케트전기(현 호남전기)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이미 각성된 의식을 갖춘 노동자들로 5·18이 발발하자 자연스럽게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 당시 로케트전기 노조는 1,200여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대기업 노조로 78년에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열흘간의 투쟁을 통해 단체협약에 승리하는 등 적극적인 노조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이 5·18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 올곧은 기록 위해 침묵했던 사람들이 제목소리 내야”
광주항쟁 전기간 홍보물 배포·취사활동 등 각종 역할 도맡아
“광주청문회 이전까지 말한마디 못하고 악몽같은 세월 살아”

로케트전기 부녀부장이었던 윤씨는 “점심식사로 지급됐던 빵과 우유를 모아 전남대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야간에는 시위에 참여했다”며 “로케트전기처럼 5·18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던 사업장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5·18이 끝난 후 초대 민주노조 지부장이었던 이정희씨(동명이인)는 회사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밖에서 강제해고를 당했다. 김대중 내란예비음모에 연루됐다는 것이 사유였다. 그 이후 윤청자, 이진행씨 등이 줄줄이 회사에서 쫓겨났으며 최연례씨가 5·18을 명목으로 85년 마지막 해고자가 됐다.

동석한 또 다른 이정희씨는 전 가족이 광주항쟁에 참여했으며 마복님씨는 카톨릭 농민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5월 항쟁기간 내내 가톨릭센터와 YWCA를 오가며 취사는 물론 투사회보 등 홍보물 배포와 사망자 명단확인, 전단·리본제작은 물론 상무관에서 향을 피우고 염을 하는 등 굳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종횡무진 활약을 했다.

항쟁이 끝난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던 이들은 지난해 이 지역 한 방송사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제작한 5월 특집 프로그램을 보고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27일 10년만에 만남을 가진데 이어 올해 두 번째 모임을 가진 것.

이쯤해서 지난 24년 동안 아무런 내색 없이 숨어 지내던 이들이 갑자기 집단보상을 신청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윤씨는 “마치 몇 사람이 광주항쟁을 주도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정말 화가 났다”며 “역사를 올곧게 기록하기 위해 이제 침묵했던 사람들이 제목소리를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 보상신청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윤씨는 또 “2002년까지 희생자, 부상자, 행불자 등이 우선 정리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다렸다”며 “그런데 일부 지도부라는 사람들이 자기 살길만 찾고 당시 생사를 같이했던 사람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씨도 “5·18단체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세를 불리려고 하도 쌈박질을 해대는 통에 이쪽으로는 얼굴도 안 돌리려고 했다”고 말한 뒤 “그 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끄집어 내 알리고 싶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24년만에 이들과 해후한 마씨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5·18만 되면 왠지 마음이 울적해졌다”며 “행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만 왕따가 되는 것 같았다”고 소외감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 전 의원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5·18의 본류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부가 해체되고 일정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면서 5·18재단이나 관련단체들이 당시 묻혀진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줄 알았는데 철저하게 외면으로 일관해 어쩔 수 없이 직접 보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항쟁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회고하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특히 이들은 여고생이었던 주소연씨가 “총을 달라. 나도 싸우겠다”고 했던 말들을 한결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윤씨는 “오죽했으면 여고생이 다시 돌아가 광주를 지키겠다고 했겠느냐”며 “당시 어른들은 뭘 했는지 각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힐난했다.

최씨는 “27일 새벽 헬기가 떠 있는 상황에서 도청을 빠져 나와 동명교회까지 가다 총을 든 공수부대와 맞닥뜨렸다”며 “그때 누군가가 전대병원 간호사들인데 야간근무를 서고 간다고 기지를 발휘해 위험을 모면했다”는 무용담을 풀어놨다.

이에 대해 이씨가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가세하자 김씨가 “광주청문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악몽 같은 세월을 살았다”고 말문을 이어갔다.

윤씨는 또 “그 당시 군인들에게 잡혀갔다가 행여나 서로의 이름을 불까 두려워 서로의 이름을 알지 말자고 했다”며 “그 때문에 도청에 있었던 15명 전체의 이름을 알 수가 없게 됐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윤씨는 이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10여명 정도가 이번에 보상을 신청할 것”이라며 “앞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숨은 사람들을 발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5·18당시 부상을 당했다가 이날 보상을 신청하기 위해 모임에 참석한 윤재형씨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광주 민중항쟁이 진행된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의 역사도 규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씨는 또 “전체를 아울러야 진정한 의미의 항쟁정신을 살릴 수 있고 5월의 아픔을 넘어 축제로 승화될 수 있다”며 “5·18의 재조명을 위해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명단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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