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중생은 결코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은 결코 둘이 아니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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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 광주 봉선동 대각사 도산 스님 인터뷰
“모든 깨달음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불법당 아닌 인간법당 짓자…94년 호산 장애인 마을 설립”
“규모·형식보다 알맹이가 중요…역할이 커야 큰절, 큰스님”

▲ 도산스님 ⓒ김태성 기자 광주시 봉선동 제석산 기슭에 자리한 대각사를 찾아가는 길은 기자에게도 일종의 고행이었다. 얼마 전까지 수려했던 경관은 오 간데 없이 사라지고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고층 아파트가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마치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포크레인과 굴삭기 등 중장비에 찢겨져 나간 산자락이 벌건 속살을 드러내놓고 신음하는 동안 초호화 아파트에 생존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새들은 서둘러 숲을 떠났다. 백주 대낮에 뭇 생명들을 학살하는 처참한 ‘아수라도(阿修羅道)’의 실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기자가 느끼는 생각도 그러할 진데 불살생(不殺生)을 실천하는 노스님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지난 20년 동안 제석산 대각사를 지켜왔던 도산 스님은 “인간의 욕망이 끝간데를 모른다”며 “의욕이 과욕이 되면 곧 고(苦)의 바다에 휩싸인다”고 말했다. 도산 스님은 또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만족의 그릇’은 채워질 수 없다”며 “만족이라는 유토피아적 허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자제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반야(般若)의 삶”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도산 스님은 10년 전 지금의 대각사 자리에 큰 불사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길이 아니다 싶어 포기했다. 다른 사찰들이 경쟁하듯 짓고 있는 ‘불법당’에 하나를 더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법당’을 지어보자는 마음에서다. 도산 스님은 이를 위해 94년 화순 운주사 뒤쪽에 장애인 공동체 마을인 ‘호산마을’을 개척하고 지금까지 이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포교이며 수행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도산 스님은 이에 대해 “규모나 형식 보다 알맹이가 중요한 것”이라며 “사찰의 규모가 크다해서 큰절이 아니고 역할이 커야 큰절, 큰스님”이라고 잘라 말했다. 도산 스님은 또 “평소에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는 부모와 함께 절을 찾은 아이에게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챙겨줬더니 그 아이가 엄마에게 “뭔가를 자꾸 주니까 ‘주지’스님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도산 스님은 순간 귀가 번쩍 트이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는 진짜 주지스님이 되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결심은 곧 ‘호산마을’이라는 구체적인 ‘실천행’으로 결실을 맺었다. 도산 스님은 또 어느 날 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무심히 듣다가 그 자리서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나는 뿡뿡이가 좋아요. 왜요? 그냥, 그냥, 그냥….” 도산 스님은 이 노래를 통해 “진정 좋아하는 것은 그냥 좋아하는 것”이라는 큰 배움을 얻었다. “어떤 이유나 조건 때문에 좋아했다면 그 이유나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좋아하는 것도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이와 함께, 도산 스님이 89년 광주대학교에 법당을 세운 일화도 꾸준히 회자되는 얘깃거리다. 당시 도산 스님은 광주대에 법당을 개설하기 위해 무작정 학교를 찾아가 강의실 하나를 보시해달라고 생떼를 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학교측에서 외부인사는 안 된다고 거절하자 스님은 89년에 시험을 봐서 신문방송학과에 입학을 한다. 도산 스님은 입학 후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인곤 이사장을 찾아가 내부인사가 됐으니 강의실을 내놓으라고 담판을 지어 법당을 세웠다고 한다. 스님이 따르던 차를 홀짝대던 기자 일행에게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느냐”고 불시에 ‘선문답’ 하나를 던졌다. 기자 일행이 진땀을 빼고 있는 사이 스님은 빙긋이 웃으며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해라”고 했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도 깨달음(初見性)이며 모든 깨달음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도산 스님은 기자일행이 끝내 답변하지 못한 선문답에 대해 “(나는)지구 위에 앉아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 자신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다. 도산 스님은 또 “깨달음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며 “법(法)도 듣는 자에게 있다”고 말했다. 도산 스님은 이어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모두 님”이라고 ‘만해’의 시를 인용하며 “부처와 중생은 결코 둘이 아니다”고 설법했다. “부처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닌 세상만물이 부처” “일체중생은 모두가 깨칠 수 있는 견성의 존재”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평화 목적 이룰 수 없어” “가난은 타인을 돕지 못하고 나누지 않는 마음” 다음은 도산 스님과 일문일답. ▲ 금년이 불기 2548년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의미가 있다면. ▲ 도산스님 ⓒ김태성기자
- 부처님이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 내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진짜 부처를 찾는 것이냐. 가짜 부처를 찾는 것이냐. 진짜 부처는 항상 머물러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다(상주불멸 常住不滅). 부처님은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만물이 부처님이요(처처불상 處處佛像) 모든 일이 부처님을 위한 일이다(事事佛供).

▲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에 대해 소개해 달라.

-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중도(中道)’로 이뤄진다. ‘중도’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다(풍광직설 風光直說).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꾸며서 보지 않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이다(정각 正覺).

두 번째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고(苦)’로 파악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우주에는 우주의 의미가 있다. 중심대로 이뤄지는 것을 인간이 바꿔놓을 수는 없다. 인간이 자연의 품(환경)에서 더불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 흔히 불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 불살생(不殺生) 계율이 보여주듯 불교는 생명존중의 종교다.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제석산 대각사 등 산과 사찰이 한 묶음이듯 사찰은 산을 지키고 가꾸는 환경 지킴이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인간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찰은 예로부터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왔다. 그래서 암자문화는 사회복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존중은 죽어 가는 것을 살리는 것 뿐 아니라 살아있는 것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살생계율은 여기까지 포함된다.

생명사상은 생물체인 유정(有情)과 무생물체인 무정(無情)까지 자비의 대상으로 본다. 중생(衆生)은 유정을 의미하지만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정과 유정을 모두 포함한다. 일체중생은 모두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견성(見性)의 존재다. 따라서 생명이 없는 것도 보호하고 돌봐야 할 자비의 대상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생이 생명(환경)사상이다.

▲ 최근 이라크전쟁 등으로 무수한 생명이 살상되고 있다. 상생을 위한 방안은 없나.

- 생명은 곧 자유다. 하지만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타인의 자유한계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탐욕(貪), 성냄(賑), 어리석음(癡) 등 인간이 지닌 삼독(三毒)이 폭발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 평화를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평화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미국도 얼마가지 않아 붕괴될 것이다. 미국식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상에 대해 세계인류가 눈을 뜨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원주의(다양성)는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불편도 있지만 인간사고의 개방과 삶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3일간만 정지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

▲ 최근 불교의 방생이 많은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그래서 15년 전 방생을 그만뒀다. 생명존중이라는 의미가 역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방생을 하자고 마음먹고 장애인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이웃을 도와야 한다. 가난은 물질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을 돕지 못하고 나누지 않는 마음이다.

지식과 물질을 소유한 것은 누군가 소유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가진 자들은 나누는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한다.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참다운 의미의 방생이다.

▲ 그 동안 종교간 화합을 모색하는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 도산스님 ⓒ김태성 기자
- 3대종교 화합운동을 8년째 전개하고 있다. 화합이라는 말에 대해 언제 싸운 적이 있었느냐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싸운 뒤에는 화해를 하는 것이다. 화합은 예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종교는 크게 보면 하나다. 모든 것을 우주의 시각에서 보면 각각이 아닌 하나다.

불교는 화합의 종교다.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하거나 반박할 필요가 없다.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도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화합해야 된다는 뜻이다. 같으면 화합할 필요가 있나. 인간의 정상(頂上)은 마음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그곳이 바로 정상이다.

정상에서 만나면 하나가 될 수 있다. 절집에는 원래 문이 없다(무차법문 無遮法門). 불교를 믿지 않는다고 일체중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이단이 없다. 항상 열려있다. 차이를 강조하는데서 이기주의가 발생한다.

▲ 선(禪) 수행과 실천 중 어느 것이 중심이 돼야 하나.

-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평화와 풍요의 시절에 절이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상관없다. 참선만 해도 된다. 하지만 세상이 어려울 때는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 속에 있어야 한다(요익중생 饒益衆生).

말법세대(末法世代)는 인간의 마음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시기다. 중생들의 교화를 위해 시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장사꾼들도 물건이 많이 팔리는 곳을 찾듯이 스님들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깨달음을 사회화해야 한다. 깨달음은 소유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의 사회화, 다시 말해 삶의 지혜를 전달해야 한다.

▲ 불교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가 왜 중요한가.

- 불교는 현세를 강조한다. 석가모니부처인 현세불(現世佛)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세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실천덕목이다. 진리가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세상을 위해 쓰여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의 깨달음은 세상을 위해 쓰여져야 의미가 있다.

현재 경제가 어려운 것은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다. 탐진치(貪賑癡)가 움직이는 한 세상은 고해(苦海)다. 고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반야(般若)다. 깨쳐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반야의 지혜를 쓸 때 평화와 극락이 온다.

▲ 종교내의 여성차별이 상당히 심각한 것 같다. 불교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은데.

- 불교에서는 비구와 비구니를 허용하고 있다. 다만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 점점 더 개선될 것이다. 조계종 종단에서도 부장급 비구니들이 등장하고 있다.옛날에 80살 먹은 비구니가 사미승 앞에서 큰절을 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변화가 왔다.

불교계가 진통을 겪으며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노출시켰다. 그 결과 불교정화 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문중개념 등 우려할 상황이 있지만 불교유치원 설립, 찬불가 보급, 사회복지 참여 등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 비해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서서히 멈추지 않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 불교계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만큼 차별문제도 잘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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