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이 선거보다 더 민주적”
“추첨이 선거보다 더 민주적”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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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마넹 뉴욕대 정치학 교수 '선거는 민주적인가' 출간
   
▲ 선거는 민주적인가
17대 총선이 끝났지만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선거기간 내내 위력을 발휘했던 ‘탄핵 심판론’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다소 몸집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의회권력’의 한 축으로 부활했다. ‘파시스트의 초상’을 앞세워 도마뱀 꼬리만큼의 책임을 유권자에게 남기고 ‘면죄부’를 얻은 것이다.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해 제1당으로 화려하게 부상한 열린우리당이라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총선시민연대가 낙선대상으로 선정했던 일부 인물들이 탄핵정국에 무임승차해 국회에 무혈입성 한 것이다. 충분히 검증 받지 못한 다수의 정치초선들도 ‘정치적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16대 국회는 ‘심판’을 받았으되 온전히 ‘탄핵’되지 못했고 17대 국회도 ‘새 부대’를 얻었지만 온전하게 ‘새 술’로 채우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17대 국회에 근 50년만에 진보정당이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지형이 기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 역시 보수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숫적 열세를 딛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또 다른 시험대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17대 총선 역시 진정한 의미의 ‘권력교체’가 아닌 ‘기득권(정치 엘리트) 교체’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아직 ‘빛나는 전망’을 담금질하기에는 여전히 미욱한 것 같다.

이와 관련, 프랑스 출신의 한 정치학자가 최근 국내에 출판된 자신의 책을 통해 ‘선거’보다 ‘추첨’을 통해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더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버나드 마넹 뉴욕대 정치학 교수가 그 주인공. 마넹 교수는 그의 저서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刊·곽준혁 옮김)를 통해 근대정치가 시작된 이래 별다른 의심 없이 민주주의의 기본 교과서로 정착된 선거제도에 메스를 들이대고 대의정치의 한계를 정면으로 공박하고 나섰다.

마넹 교수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뽑는 대의정치가 가장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추첨제를 통해 참정관을 선발한 직접 민주정치가 진정으로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추첨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넹 교수는 ‘추첨제’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민주정치의 기본적인 원칙이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고전적 명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고대 아테네에서는 ‘추첨’ 방식을 통해 무작위로 대표를 뽑는 직접민주주의가 근 200년 동안 지속됐었다. 근대 정치학에 큰 영향을 끼친 아리스토텔레스도 “추점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이며,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마넹 교수는 ‘추첨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간극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출방식’인데 비해 ‘선거는 특출한 재능이 있거나 전문가들에게만 통치권을 부여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특화된 전문기술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았지만 절박한 이유가 없는 한 비전문가들이 정치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봤다. 사실 아테네의 모든 평의회 의원과 판사들 그리고 대부분의 행정관들은 전문가가 아닌 보통 시민들이었다. 결국 ‘추첨제’는 소수 전문가 중심의 정치에 대한 일반 민주주의자들의 깊은 불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근대정치가 ‘왕권신수설’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의 ‘세습제’를 극복하고 ‘선거제’라는 대의 민주주의를 착근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계몽철학자들의 공이 컸다. 존 로크, 장자크 루소 등 자연법 학자들이 ‘천부인권설’을 앞세워 ‘사회적 동의’에 기초한 ‘정치적 복종’이라는 일종의 ‘사회계약 모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가 ‘추첨’을 통한 ‘인민의 직접참여’에서 ‘선거’를 통한 ‘인민의 동의 위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선거권자와 피선거권자의 지위가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마넹 교수는 이를 ‘탁월성의 원칙’으로 명명했다.

결국 ‘선거’는 권력에 대한 동의를 창출하는 과정으로 체계화 됐으며 ‘선거’를 통해 선출된 통치자들은 동의의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특권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들 통치자들은 이제 선거권자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선을 넘어 민주정치를 협박하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한 16대 국회는 대의제 정치의 극단적인 폐해를 한 눈에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물론 마넹 교수가 대의정치의 모든 것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낙관적인 것 같지도 않다.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일반인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는 등 민주주의의 진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넹 교수에게 선거권자와 정치적 대표의 간극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는 언제나 부유한 계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미디어’ 역시 오랫동안 노출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세력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넹 교수에게 선거를 통한 교체는 단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의 퇴조”에 지나지 않는다.

마넹 교수는 또 “오늘날 누구나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그 만큼의 확신을 갖고서 민주주의가 심화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통령 탄핵사태로 촉발된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특권을 제한하자거나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자는 등 갖가지 논의가 분분하다. 물론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6대 국회를 심판하고 낡은 정치와 기득권 세력을 한방에 날려버린 것도 영남지역에서 파시스트의 부활을 가능케 한 것도 바로 ‘선거권자’ 자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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