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개방 찬반 국민투표하자”
“쌀 개방 찬반 국민투표하자”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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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부터 쌀 재협상…중국 미국 태국 등 8개국 한국시장 눈독

농민단체, 식량주권 수호…쌀 자급률 법제화 등 입법노력 병행
정부, ‘관세화 유예’ 무게 피해 클 땐 관세화도 고려할 수도

   
▲ 쌀 수입 반대 ⓒ김태성 기자
제2차 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의 ‘식량주권’ 침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수탈의 한 가운데 한국이 위치하고 있다. UR을 앞세운 제1차 공세 때보다 ‘전황’은 더욱 악화된 것처럼 보인다. 세계 주요 쌀 수출국들이 한국시장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그 동안 ‘관세화 유예’라는 ‘땜질처방’으로 최소물량(MMA)만 받아들이며 근근히 버텨 왔다. 이제는 그마저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올해로 10년을 꽉 채운 ‘관세화 유예’의 보호막이 WTO 앞에서 무장해제 당할 위기상황에 처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도 ‘개방 대세론’을 앞세워 변변한 보호장비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지난 10년을 허송세월로 탕진했다.

이래저래 ‘쌀 개방’의 높은 파고에 맞서 생사를 건 싸움에 나서야 하는 것은 여전히 ‘농민 몫’으로 남게 됐다. 흡사 지난해 9월11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 반대 시위 도중 할복자살한 고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대면하는 듯 하다. 기실 이경해 열사의 죽음은 세계화로 표상 되는 WTO와 초국적 자본에 의한 타살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농민들도 이번만큼은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태세다.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단체들이 전국적으로 ‘식량주권 수호’와 ‘쌀 개방반대’의 한 목소리를 모아가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또 쌀 개방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12월에 실시하자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와 함께, 17대 총선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강기갑 부의장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 소속 현애자 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이 민주노동당 후보로 당당히 원내에 진입한 것도 이들의 싸움에 자신감을 더해주고 있다.

- 쌀 양자협상 대상 8개국 결정

정부는 지난 1월20일 WTO에 쌀 재협상 개시 의사를 전달했다. 지난 95년 체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결과, 쌀에 대해 예외적으로 시장개방을 10년간 유예 받았는데 올 연말로 그 기간이 끝난 것이다. 한국정부는 10년간 관세화를 유예 받는 대신 쌀 수출국들의 국내소비량 1∼4%에 달하는 일정물량(최소의무 물량·MMA)을 수입해왔다.

정부는 이에 따라 쌀 재협상 상대국가들과 관세화 유예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을 개방할 것인 지 여부에 대해 연말까지 결정해야 한다. 정부에 따르면 쌀 재협상 참가통보 최종 마감일인 20일까지 협상의사를 밝힌 나라는 중국, 미국, 호주, 태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인도, 이집트 등 8개국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보시한이 권고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 가운데 한국에 수출실적이 있는 나라는 중국, 미국, 호주, 태국 등 4개국이다. 이들 국가들은 UR협상에 따라 지난 95년 이후 최소시장접근(MMA) 방식으로 제한적이나마 쌀을 수출해왔다. 지난해의 경우 중국이 11만5000t으로 가장 많은 수출량을 기록했고 미국이 5만5000t, 태국이 3만t으로 그 뒤를 이었다.

한국에 쌀 수출실적이 있는 주요 4개국을 제외하면 나머지 국가들은 국내 쌀과 같은 중단립종(자포니카) 쌀이 아닌 장립종(인디카) 쌀 수출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국가들이 쌀 재협상에 뛰어든 것은 양보를 무기로 다른 분야에서 개방 이익을 잡아보겠다는 ‘노림수’로 해석된다.

-정부의 쌀 협상 방침

정부는 양자협상 참가국들이 확정됨에 따라 내달부터 구체적인 협상에 나설 계획이다. 일단 관세화 유예 연장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재협상에 나설 계획이지만 그럴 경우 협상 상대국에 저율관세 할당물량(TRQ) 증량 등 추가적인 양허 조치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관세화 유예를 연장할 경우 상대국에서 원하는 만큼 양보를 해야 한다는 WTO의 규정 때문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관세화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정부는 지난달 16일에 농림부·외교통상부·재정경제부 등 8개 정부부처가 참여한 테스크포스 형태의 ‘쌀 협상 대책 실무추진단’을 구성했다. 이어 17일에도 이헌재 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주요 쌀 수출국들의 동향 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때문에 정부는 이번 쌀 재협상에서도 안팎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의 지연으로 관세화에 따른 개방폭 등이 확정되지 않은 점도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관세화 전환과 관세화 유예 연장 사이에서 유·불리를 따질 수 있는 잣대가 마련되지 않은 까닭이다.

이와 함께, 중국이 한국시장을 겨냥해 대규모 무공해 쌀 농사 단지를 조성하는 등 대대적인 개방공세를 예고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수입쌀의 시중유통 등 추가적인 조치를 압박하고 있어 협상의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다. 이밖에도 일부 협상 참가국들이 쌀 분야의 양보를 미끼로 다른 분야의 개방 확대를 요구하는 등 새로운 골칫거리로 부상할 전망이다.

반면 정부는 관세화 유예 10년 동안 농촌에 42조를 투자한 것 이외에 농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농민들을 설득할 논리와 전략부재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내 진입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이 ‘쌀 관세화 반대’와 ‘MMA 물량의 증량 반대’를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어 원내에서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정부로선 9월말까지 양자 협상을 끝낸 뒤 이를 토대로 작성한 양허안을 WTO에 통보하고 3개월간의 검증절차를 밟아야 한다.

-농민단체의 입장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단체들은 ‘쌀 개방·관세화=농민 제삿날’로 배수진을 치고 ‘관세화 유예’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농민단체들은 특히 정부가 “관세화 유예에 따른 피해가 클 경우 관세화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단 ‘관세화 유예’를 못박은 뒤 농민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입량 증대’와 ‘관세화 유예 기간’에 대한 협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단 관세화가 통과되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는 절박성의 반영으로 풀이된다. 현재 중국산 쌀과 우리 쌀의 가격대비가 1만5천원 대 18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산 쌀에 300%의 관세를 매겨도 가격경쟁이 불가능하다는 셈 법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광주전남농민연대는 20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어떤 형태로든 쌀이 개방되면 우리 농업의 장래는 기약할 수 없으며 우리 농민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며 “농업·농촌문제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국민의 생존권 문제”라고 주장했다.

농민연대는 이어 “농업개방 10년으로 식량자급율은 25%로 떨어졌고 농민들은 농가부채와 농산물 가격 연쇄폭락으로 몰락위기에 처해있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쌀 개방을 전제로 수매제 폐지를 주장하고 관세화나 최소시장접근물량 확대로 쌀 개방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 농민연대는 ▲쌀 개방 반대-개방 대세론자 협상단 제외 ▲식량자급률 법제화와 대북지원 법제화 연내 제정 ▲목표가격 예시제(목표가격 직접지불제) 조속 실시 등을 촉구했다.

농민연대는 이를 위해 6월까지 ‘쌀 개방 저지, 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9월 ‘전국 100만 농민대회’를 개최한 뒤 정부에 12월까지 ‘쌀 개방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강력 요구할 방침이다.

민주노동당 전라남도당도 21일 논평을 통해 “이번 쌀 재협상의 본질은 관세화를 할 것이냐 관세화 유예를 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식량자급을 안정적으로 조절·통제할 수 있느냐 아니면 식량주권 자체를 외세 통제권에 넘겨주느냐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전남도당은 이어 “총선 공약인 식량주권 사수와 쌀 수입반대의 공약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며 “쌀 수입반대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연해해 반드시 쌀 수입을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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