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하나님이 무슨 의미 있나”
“인간 없는 하나님이 무슨 의미 있나”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4.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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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로 정년 맞는 광주 남동성당 김로마노 신부
‘고희(古稀)’
▲ 김종남신부 ⓒ김태성 기자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까마득한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두보(杜甫)가 시 곡강(曲江)에서 노래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가뜩이나 ‘노풍(老風)’으로 심란한 어르신들에게 볼기맞기 딱 좋은 소재다. 어찌 어르신들 앞에서 ‘사람의 나이 일흔이 예로부터 드물다’는 불경의 설화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두보가 ‘고희’ 속에서 보물처럼 찾아냈던 빛나는 진실을 추적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의 나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연륜의 깊이’까지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보는 이미 ‘인생칠십’이 지닌 ‘심미안’을 벌써부터 꿰뚫어 봤던 것이다. 이제 말머리를 돌려보자. 여기 한 사제가 있다. 김종남 로마노 신부(70·광주남동성당 본당 주임). 그의 나이 일흔.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다. 노을처럼 보면 볼수록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 중 44년은 자기 이름도 없이 신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하는 종으로 살아왔다. 더 없는 보람이었지만 고통과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동반자였다. 그래서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카메라 하나 어깨에 둘러매고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길 위를 헤매기를 20년. 김 신부는 사진과 동고동락 끝에 그 길 어디선가 잉태한 ‘빛과 명상의 시어’를 알토란같은 두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수상집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생활성서·6,000원)과 사진이 있는 명상집 ‘명상의 창’(생활성서·35,000원) 증보판이 그 주인공. 김 신부는 그 둘을 ‘아들’과 ‘딸’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두 권의 책은 김 신부가 91년부터 월간 ‘사람사는 이야기’와 월간 ‘사진예술’ 그리고 천주교 기관지인 ‘경향잡지’에 기고했던 ‘사색의 조각들’(칼럼)과 ‘창조의 신비’(사진)들을 모아 고희 기념으로 펴낸 것이다. 특히 김 신부는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광주남도예술회관 1층에서 출판기념회와 10년만에 갖는 사진전을 끝으로 공적인 사제생활을 접을 것으로 알려졌다. “사제들이 민주화를 외쳤던 것은 인간문제에 종교가 함께 한다는 뜻” “신이 창조한 신비와 손길을 다시 보여주는 창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인생을 살면 그때마다 가치로운 것이 있다” 29일부터 ‘명상의 창’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출판기념회·사진전 개최 ▲ ⓒ김태성 기자
김 신부는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과 함께 천주교로 개종한 뒤 서울 성신대학 부속중학 시절부터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고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평소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그림을 좋아했으나 61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로는 그림을 하기가 어려워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것이 사진이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카메라 하나만 매고 산과 들로 쏘다니다가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벌써 20년이란다.

“하나님이 창조한 신비와 손길을 다시 조명해 보여줄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 자신이 신이 창조한 아름다움과 신비를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명상의 창’이다.

반면 ‘노을 보다 더 아름다운’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낀 단상과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써 내려간 일종의 자전적 수양서다.

김 신부는 지난 20년 동안 전국 각지는 물론 세계 3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화려한 나라들보다는 주로 오지를 찾았다고 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나중에 모두 돌려주고 싶었어요. 구한말 프랑스 신부들이 찍어놓은 사진들이 우리민족의 귀중한 자료가 됐듯이 먼 훗날 그 나라 사람들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김 신부는 부자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 그것도 소수민족의 문화와 삶을 충실하게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하지만 아직 북한은 가보지 못했다. 아직까지 큰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김로마노 신부 인생 70년. 사제 44년. 사진20년 출판기념및 사진전시 그렇다면 김 신부는 도대체 렌즈에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의 내면,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사계는 퍽 닮았습니다.” 그래서 김 신부는 인간의 내면적 슬픔과 고통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곳이면 상가든 공원묘지든 닥치지 않고 찾아다녔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슬픔 속에서 ‘창조주의 손길’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래서였을까. 언뜻 본 김 신부의 작품에서 뭔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진한 슬픔이 느껴졌던 이유는. 순간 그의 작품에 깃 든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정화의 기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을 통해서만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삶의 빛깔 같은 것 말이다. 김 신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하나의 꽃”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절에 충실해야 합니다. 인생의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파란 삶을 드러내야 합니다. 반성의 계절, 낙엽 지는 가을이 곧 될텐데 가장 푸를 수 있는 계절에 푸름이 자기 안에 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가을’에 비유한 김 신부는 “사계 가운데 특별히 어느 계절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며 “다만 노을을 보면서 감동에 젖듯이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인생을 살면 그때마다 가치로운 것이 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또 “삶과 죽음은 늘 더불어 있다”며 힌두교의 윤회론을 인용해 지금, 여기에서 잘 살기를 주문했다. “과거에 잘못 된 삶을 살았으면 오늘 내가 불행한 것이고 전생에 잘살았으면 지금 좋은 것”이니 “훗날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김태성 기자
김 신부는 또 사제로 살아왔던 44년의 인생에 대해서도 솔직 담백한 모습을 보여줬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을 하는 동안 왜 외로움이 없었겠냐”고 반문한 뒤 “슬픔과 괴로움을 통해 자신이 성숙되고 다른 이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어떤 몫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사제의 삶으로서 행복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걷겠느냐는 질문에 “사제로서 어려움도 고통도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없다”고 말한 뒤 “더러는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내 몫을 다하지 못할 때는 내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진다”고 답변했다.

김 신부는 또 교회와 사제의 역할을 묻자 “종교는 인간의 삶 가운데 있을 때 의미가 있다”며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이 무슨 의미인갚라고 반문했다.

김 신부는 또 “남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사제들이 어려운 시절 민주화를 외쳤던 것은 실제로 인간의 문제와 종교가 함께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80년 당시 단식하고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고 촛불을 밝혀 도청으로 행렬을 지어가던 당시가 가장 아름다웠다”며 “교회가 자기 몫을 다할 때 교세가 가장 많이 확장됐다”고 지적했다.

김 신부는 마지막으로 인류문명의 발상지이자 아브라함의 고향인 이라크의 우루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 ⓒ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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