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부는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과 함께 천주교로 개종한 뒤 서울 성신대학 부속중학 시절부터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고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평소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그림을 좋아했으나 61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로는 그림을 하기가 어려워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것이 사진이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카메라 하나만 매고 산과 들로 쏘다니다가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벌써 20년이란다.
“하나님이 창조한 신비와 손길을 다시 조명해 보여줄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 자신이 신이 창조한 아름다움과 신비를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명상의 창’이다.
반면 ‘노을 보다 더 아름다운’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낀 단상과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써 내려간 일종의 자전적 수양서다.
김 신부는 지난 20년 동안 전국 각지는 물론 세계 3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화려한 나라들보다는 주로 오지를 찾았다고 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나중에 모두 돌려주고 싶었어요. 구한말 프랑스 신부들이 찍어놓은 사진들이 우리민족의 귀중한 자료가 됐듯이 먼 훗날 그 나라 사람들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김 신부는 부자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 그것도 소수민족의 문화와 삶을 충실하게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하지만 아직 북한은 가보지 못했다. 아직까지 큰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김 신부는 또 사제로 살아왔던 44년의 인생에 대해서도 솔직 담백한 모습을 보여줬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을 하는 동안 왜 외로움이 없었겠냐”고 반문한 뒤 “슬픔과 괴로움을 통해 자신이 성숙되고 다른 이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어떤 몫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사제의 삶으로서 행복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걷겠느냐는 질문에 “사제로서 어려움도 고통도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없다”고 말한 뒤 “더러는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내 몫을 다하지 못할 때는 내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진다”고 답변했다.
김 신부는 또 교회와 사제의 역할을 묻자 “종교는 인간의 삶 가운데 있을 때 의미가 있다”며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이 무슨 의미인갚라고 반문했다.
김 신부는 또 “남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사제들이 어려운 시절 민주화를 외쳤던 것은 실제로 인간의 문제와 종교가 함께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80년 당시 단식하고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고 촛불을 밝혀 도청으로 행렬을 지어가던 당시가 가장 아름다웠다”며 “교회가 자기 몫을 다할 때 교세가 가장 많이 확장됐다”고 지적했다.
김 신부는 마지막으로 인류문명의 발상지이자 아브라함의 고향인
이라크의 우루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