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프 크라이스트]의 멍에, ‘시지프스의 바윗돌’
[패션 오프 크라이스트]의 멍에, ‘시지프스의 바윗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04.08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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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가 걷는 영화산책

내가 맨 처음 만난 예수는 할머님 방의 천장 쪽에 바짝 걸린 십자가이다. 흉측해 보였다. 저런 걸 왜 방에 걸어 두었는지 이상해서 몇 마디를 할머니께 여쭈었고, 답변 말씀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리에 씌워진 게 “까시”라는 말에 진저리치며 더는 쳐다보지 못했다. 그 뒤론 할머니 방에 가는 걸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를 눈이 닳도록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지는 귀가 닳도록 듣게 되었다.

▲ 패션오브크라이스트ⓒCineCine 서양의 생활을 몸소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내가 만난 서양의 학문과 예술에는 ‘강렬한 극단성’이 깊이 배어 있다. 불변의 진리나 극단적인 이상향을 향한 갈망이 지극하고, 선과 악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사고틀이 뼈 속 깊이 박혀 있다.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그러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그러하며, 학문과 예술에 모두 그러하다. 하다 못해 서양문화의 이러한 극단성을 깡그리 부셔버리려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의 도전마저도 그 극단성의 수렁에 빠져 있어 보인다. 서양문명이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는 멍에인 것 같다. 현대의 진보적 예술이 자학적 그로테스크로 뒤틀리고 병든 이유도, 현대의 보수적 예술이 극단적인 악마를 설정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향한 희망에 강렬한 감동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서양 학문과 예술은 자기 집착의 도덕적 결벽증이나 정신병적으로 뒤틀린 반항에 빠져, 메마르고 빡빡하거나 뒤틀리고 비비꼬여 있지 않은 게 없다. ▲ 패션오프 크라이스트
도무지 소박하고 담담하고 그윽한 맛을 찾기 힘들다. 이제 나이 들어 돌이켜 생각하니, 내 어린 시절에 만난 ‘십자가에 못 박힌 가시면류관의 예수’가 보여주는 극렬한 숭고함과 잔혹함의 대립에서, 서양문화가 태생적으로 짊어진 ‘시지프스의 바윗돌’을 보게 된 것이다. 이라크 사태도 그 업보의 어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영원한 업보로 ‘미친 피바람’을 몰고 올 그 정신분열적인 천형天刑이 두렵고 지겹다.

이 영화는 위선과 무지가 낳는 극렬한 잔혹함에 악惡을 걸고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는 거룩한 숭고함에 선善을 두어, 그 악에 처절한 분노를 일으키고 그 선에 사무친 사랑을 바치도록 몰아간다.

스토리나 대사는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단지 그 분노와 사랑이 훨훨 불타오르도록 선과 악의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열차다. 극렬하게 잔혹하여 숨막히도록 엽기적이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엽기 장면보다는 그들의 이토록 가열찬 의지가 불길하고 두렵다. 눈물로 회개하고 다짐하여 더욱 굳건해질 그들만의 ‘도덕적 결벽증과 집단적 자폐증’이 심히 염려스럽다.

   
▲ 패션오프 크라이스트
들려오는 예수님과 부처님의 거룩하신 위대함에 주눅이 들어, 교회 성당 절을 다녀보려고 애써보았다. 거기에 얽힌 사연도 많고 많다. 시건방진 건지 어리석은 건지, 그 분들의 말씀이 도무지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다.

더구나 세속종교가 상류층과 밀고 당기며 벌이는 파워게임에 깊게 얽혀 있으며, 또 하나의 권력으로 ‘사회구조적 음모’가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보자면 결국은 유치한 자기 집착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화장도구 또는 세상살이에 갖은 편리함을 얻어내는 생활방편으로 보인다. 무슨 ‘삐딱 귀신’에 쓰인 모양이다.

이 잡귀가 빵구난 건지, 생전 처음으로 예수의 생애에 감동한 적이 있다. 교육방송에서 재작년 연말에 방영되고 작년 연말에 다시 방영된, 3부작 다큐멘터리 [예수]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찬양하고 경배하던 그 어떤 말과 글이나 영화에도 나의 이 못된 삐딱함이 제대로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이걸 보고서야 예수님을 스스로 우러나서 존경하게 되었다.

나란 놈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 주어야 알아먹는 체질인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생활에서 만나는 그 종교와 그 사람들에겐 많은 반감이 있다. 서양문명에 박힌 도덕적 결벽증이나 퇴폐적 자학증이라는 극렬한 정신분열적 이중성의 수렁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이라크 사태에 오버랩 되면서, 세상이 차암 지겹도록 슬프다. 지구는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 우린 인간을 통째로 절망한다.

/김영주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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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2004-05-08 10:17:06
관광객님께

* 막달라 마리아로 나오는 '모니카 벨루치'가 포르노배우인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그녀가 [말레나]에서 매혹적인 요염함에 끌렸습니다. 요즘에 잘 뜨는지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미션 클레오파트라], [매트릭스]에서 잠깐 출연, [돌이킬 수 없는]. 특히 [돌이킬 수 없는]에서 충격적인 연기를 보면서 단순히 얼굴 파는 배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 <시민의 소리>에서 요구하는 글량이 원고지 10장이기에, 어떤 초점 하나를 잡아 쓰면 글량이 끝나버리기에, 어떤 영화의 다양한 측면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화 하나에 하나의 이슈만을 잡아 쓰게 됩니다. 물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점이 있기도 합니다. 독자의 지적으로 그 때서야 알아채리기도 합니다. 님과 같은 독자글이 많아서 영화의 다양한 측면이 많이 보여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영화평론'이 아닙니다. 김영주라는 어떤 개인이 영화를 소재로 하여 어떤 이슈를 소재삼아 세상이야기를 하는 산책입니다. 그래서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영화칼럼니스트'로 한 것입니다.

* 이 글의 주제 자체가 서양문명이나 잘못된 종교적 집착으로 인하여 불길한 인류의 미래입니다. 그걸 상징적인 제목으로 '시지프스의 바윗돌'이라고 하였고요. 지금 인류의 암울함과 미래의 불길함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님께서는 이런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 저의 글에 호감이든 반감이든, 독자의 의견글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단 무턱댄 비난이나 선언적 매도는 서로 삼가해야겠습니다. 제 글이나 영화의 어떤 면이 어째서 좋은지 싫은지를 알 수 있게 글을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광객 2004-05-03 1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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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 이 영화는
성경에는 없는 허구적인 상상력을 한껏 쏟아부어 시각적인 자극을 유도한
엽기적 폭력물일 뿐이지요.
현대 관객들의 새디즘과 매조키즘을 동시에 노린 돈벌이 성공작....
헐리우드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게 되어있지요.
막달라 마리아로 분장한 여배우가 이태리의 유명한 포르노 배우인 것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빌라도의 부인으로 나온 여배우들이 죄다
훌훌 벗고 찍는 R 등급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을 쓴 것은 차치하더라도
현대 세상의 온통 우매한 종교인들이 못알아먹는 언어 -
로마사람 빌라도가 예수에게 히브리어로 질문하고
히브리 사람 예수는 빌라도에게 라틴어로 대답하는 어처구니 없는
전혀 현실성도 역사성도 없는 픽션물인 것을 아시게 되면
영상 매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단 바람몰이에 휩쓸려 가게 하는지
카톨릭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트레스 디아스의 슬픈 역사를
단순히 과거지사로만 돌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직감과 함께
이 문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끔찍한
불안감을 느끼시는 단계에까지 다다르셔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영화/문화 비평을 하실 생각이시라면 말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그 목적과 의미가 칭송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가지고 팔아먹는 돈벌이 흥행사들이 칭송을 받고 있지요?
그리고 그런 자들이 존경을 받고 영광을 대신 독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헐리우드에도 있고 성당과 교회들에도 있지요?
그리구 너무 많지요....?

광란의 바람(風)에 휩쓸리지 않은 산책담을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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