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가 사는 법
노부부가 사는 법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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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들과 함께 가까운 절에라도 다녀올 생각으로 시골집으로 향했다. 도착하기 전에 전화를 하였더니, 아버지가 받았다.
"집에 계실 거예요?"
"아니 나는 아곱 시 반에나 나가봐사 쓴다."
"어디 가시는디요?"
"오늘 골안에서 유치 문중 시양이 있어 갖꼬, 거그 가봐사 쓴다."
마을 깊은 곳에 '골안'이 있고, 거기에는 나의 성씨인 인천 이가들의 사당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천 이씨 만수파의 사당이다. 그 사당에서는 여러 번 시제를 지내는데, '만수파' 전체를 합친 대문중 아래에 여러 사문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넓게는 만수파에 속하고, 좁게는 10대 종가인 우리집을 중심으로 한 사문중에 속한다. 만수파의 선산은 용두봉 아래 조분골에 위치해 있는데, 어린 시절 시제가 있는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조분골 쪽을 바라보느라 목이 아팠다. 다른 집 아이들은 시제 지내는 곳으로 가기도 하였지만, 우리집에서는 그런 행동은 금기에 가까웠다. '얻어 묵우로(먹으러) 댕기는 것'을 철저히 금했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럼. 엄니도 시양(시제) 지내는 디 가실 꺼예요?"
"아니. 늑 엄니는 깽밴 밭에 꼬치(고추) 따로갔다."
평생을 농촌에서 살았으면서 아버지는 일흔이 넘었지만 지게질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딴 디서 돈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근다고 책만 팜서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50여 년을 함께 산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평이었다. '그런 사람을 바라보고 살랑께 우쨌껐냐? 그래도 나는 팽상얼 삼서 딴 맘언 안 묵었다. 내야 복이 이만이나밲이 안 되는 몬양이라 이란 사람을 만냈능갑다. 그라고 살었다. 나는 어디럴 가드라도 조란 사람밲이 못 만날 것이다. 그라고 살었다. 그랑께는 느그 같은 자석들도 두고 그랬재.'

마을 앞으로 간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호계천 너머에 있는 깽밴 밭으로 향했다. 다리를 건너자 멀리 키 작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농로를 따라 가까이 가자 어머니가 '누구일까?' 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니는 메칠 전에 댕게 갔길래. 흐칸 차길래, 인흠이가 온다냐? 그라고 있었다."
나는 고추가 가득 든 포대를 짐칸에 실었다.
"엄니. 놀로(놀러)나 갑시다."
"어디로 가야?"
"쩌그 강진 백련사로 해서 다산초당으로 해서 엄니 친정 동네짝으로 돌아보고 옵시다."
"얼릉 옷 갈아입고 갑시다."
내가 재촉을 하자,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아버지의 끼니를 걱정하였다.
"아부지. 보고 갑시다. 걱서 그냥 식사하시라고 하먼 될 꺼 아니요."
"글자."

어머니를 태우고 사당이 있는 골안으로 향했다. 제각 마당에 서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들어오라는 말만 하면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일로 조깐 나와보란 말이요. 할말이 있이닝께."
한참 지나 어머니가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아버지가 마루로 나왔다.
"들어와서 술이나 한 잔 하고 그라랑께는."
"내가 무다라 얻어묵우로 온 것 맨이로 딸랑 들어갈 껏이오?"
"조라고 청백이(자기만 깨끗한 것처럼 하는 사람) 같이 그란당께."
"딴 것이 아니라, 조것이 놀로 가장께. 따라갔다 올텡께. 여그서 점심 자시고 늦게 내래오씨요이."
어머니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것이었다.

칠십 년 넘게 살면서 자기 손으로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행여 밖에서 일박을 하게될 일이 생기면, 동네의 다른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여 아버지의 밥상을 보게 하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맞추어 살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법이 되어 낮 동안 놀러가면서도 끼니 걱정 때문에 기어이 당부를 하는 것이다.
강진으로 가서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거쳐, 바다 구경을 하고 칠량으로 대구 미산 등을 돌고 나서 집으로 왔더니 오후 네 시가 넘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란해도 자네 올까니 멫 번이나 사장에 나가 봤네."

어머니가 언제 돌아오느냐 싶어서 두 번이나 신작로가 보이는 사장거리에 나가보았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아버지는 샹끄네기를 꺼냈다.
"같이 묵을라고 안 녈고 있었네."
예전처럼 짚으로 만들어 음식을 싼 것은 아니었지만, 비닐 봉지 속에 든 시제 음복 음식은 다양했다. 찰떡과 꼬막, 고기전과 버섯전, 유자와 밀감, 돼지고기 삶은 것과 생선 반 토막 등 짐작에도 준비를 많이 한 시제 상차림이었을 것 같았다.
"우와마. 챙피해불듬마."
아버지는 이내 우리 문중의 시제 이야기를 하였다. 유치 문중 사람들은 남들 보란 듯이 상차림을 하였는데, 며칠 전의 우리 문중 시제는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흥분해서 말을 하던 아버지가 문득 '술 잠 가조소(가져오소).' 그랬다. '암마. 또 술 묵을라고. 많이 묵었구마는.' 아버지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가 타박을 하고 나섰다. '가져 오라먼 가졸(가지고 올) 것이재. 문 말을 하먼.' 술이 되었건 그 무엇이 되었건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가져와 먹는 경우가 없었다. '조라고 이게(우겨) 싸까. 술도 많이 되았구마는.' '어허. 조것이!' '빙원에서 의사가 석 달 동안 묵지 말락 했담서.' '뭇이 석 달. 인자 다 나섰응께. 괞잔해.'

한 달 전쯤 아버지는 발톱 무좀 때문에 병원에 가야했다. 아버지가 진료를 하러 병원에 가던 날, 어머니는 한 가지 꾀를 내어, 병원에 간호보조사로 일하고 있는 제수씨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야. 늑 아부지 빙원에 간당께. 니가 의사 선생한테 잘 이약해서 술 묵으먼 큰일 난닥 해부러라이.' 어머니의 말을 들은 제수씨는 의사에게 그런 말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진료를 맡았던 의사는 아버지에게, '어르신 술 드시면 발가락이 썩게 됩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의사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던 기간이 석 달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의사가 그라듬마. 삼 개월만 자시지 마시요.' 아버지의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깨를 꼬집으며 웃었다. '내나 석 달이락 할 때는 아니락 하듬마는 인자 삼 개월이락 하네이.' 비로소 어머니의 말을 깨달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등을 톡 때리며 웃었다. '석 달하고 삼 개월은 다르재이. 우선 말부터 틀려부요안.' 내 말에 방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야. 니가 가서 술 좀 가지오그라. 늑 엄니가 저라고 권세를 부릴락 한단마다."
아버지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하였지만, 나는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결국 술병은 어머니가 들고 왔다. '에징간이 자시씨요.' '어허. 조라고 말을 해싸까이. 술을 묵어도 내가 묵은닥 하먼 묵는 것이고, 안 묵은닥 하먼 안 묵는 것이재. 나는 안 묵은닥 하먼 그날로 다짐 해부러.' 실제로 아버지는 한 번 다짐을 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루 세 갑 이상씩 피우던 담배를 끊은 것도 어느 날부터 시작해서 십 년이 넘었고, 술도 십 년 정도씩 끊었던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늑 엄니 때문에 못 살겄다야. 인자는 벨 것을 다 갖꼬 나를 휘어잡을락 한단마다.' 웃으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너 참 봤지야. 화단에 국화 좋지야?"
마당가를 둘러싼 화단에는 황국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좋습디다.' 내 말끝에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섰다.
"봄에 사장어른이 한 그루 갖다 주길래. 내가 일일이 꺾꽂이해서 그라고 숨었다(심었다). 징상나게 많이 폈어야."
"멋이 자네가 했다고 긍가. 내가 욍게 싱겠구마(심었는데)."
"아아따. 말은 바로 해사재. 멫 그루 욍긴닥 하드니, 하도 안 했길래. 내가 일일이 숨었구마는."
어머니가 한 번 더 당신이 심었다고 하자, 아버지가 한 발짝 물러났다.
"누가 싱겠든지 간에 보기에 좋지야?"

틀림없이 대개의 황국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심어지고 자랐을 것이지만, 누가 심었든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덕분에 늦가을 집안이 꽃으로 환했다.
"그나저나 늑 엄니 어깨 잔 주물러 디래라. 이참에 태국가서도 안마 받으란디(받으라는데) 4만원이나 한다고, 우리 아들이 할 지 안디(할 줄 아는데), 무다라 받어야 그라고 왔단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꽃불이 환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의 일상이 그렇게 피어난 것처럼 여겨져서 오랜만에 내 마음도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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