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위해 나는 또 집을 나섭니다”
“만남을 위해 나는 또 집을 나섭니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3.12.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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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수 ‘아름다운 산행’(다지리·9,000원)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속에는 속세에 찌든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장갑수의 산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아름다운 산행'을 읽으며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두 번 수인사를 나눈 것이 만남의 전부였지만 그의 얼굴에 살포시 피어나던 편안한 미소만큼은 오랫동안 내 기억의 언저리에 머물렀던 것 같다. 당시 그 편안하고 은근한 미소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는데 오늘에서야 제대로 그 해답을 찾은 것 같다.

‘산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인간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탐욕을 조금씩 빼앗아 갑니다. 그런 점에서 산행은 만행입니다.”
그랬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을 덜어내고 씻어내려는 ‘만행’의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지닐 수 없는 보조개 같은 해사함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산행’을 읽으며 나의 ‘만행’은 시작됐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세심’과 ‘개심’의 ‘피안’을 어렴풋하게나마 본 것도 같다. 초보 엉터리 수행자치곤 크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산행’의 속삭임은 매우 사색적이며 철학적이고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산행’은 산에서 발원해 결국 산으로 향하는 ‘삶과 만남’에 대한 그리움의 이야기다.

역사·철학·사람·문화 등 망라된 영양가 만점 짜리 인생 지침서
자연·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여성미 넘치는 섬세한 문체 강점


“삶은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자연과 만나고 우주와 만납니다. 나와의 만남은 모든 만남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나와의 만남이 아름다워야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아름답습니다. … 그 만남을 위하여 나는 또 집을 나섭니다.”

그가 집을 나서 숱한 만남을 통해 정작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자질구레한 세상사에 대한 하찮음’이거나 ‘뒤틀린 나무의 강력한 생명력’ 혹은 ‘탐욕으로부터 해방된 가난한 마음’이거나 ‘자기 몸을 태워 성불하는 소신공양’은 아니었을까.

이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의 경지다. 저자가 카메라 렌즈와 마음의 눈을 일치시켜 피사체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다면 바위와 나무 그리고 산은 단순히 대상화된 객체로 우리 곁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머무는 그 자리에서 자연은 이미 생명력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산의 남성성에 대비되는 여성미 넘치는 문체와 섬세한 표현은 마치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잘 조탁된 눈부신 시어를 보여줘 읽는 이의 마음을 잔뜩 설레게 한다.

그리고 만남은 종국에 가서 구체적인 역사·철학적 사색의 성과로 우리에게 두 배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성격과 질을 가진 사물이 만나 오히려 균형과 행복한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랄지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 그렇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객체화되고 물화 된 대상이 아닌 서로 침투하고 상호작용하는 주체로서 자연의 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연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 같다.

이와 함께 ‘티 없는 순진무구한 눈’과 ‘산이 인간에게 주는 외로움’을 통한 자기정화 기능과 ‘가파름에서 배우는 세상의 이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와 ‘버림의 미학’ 등이야말로 저자가 ‘절을 찾고 산을 오르는 이유’이자 ‘아름다운 산행’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 내가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좋은 자리이고 경이로운 순간’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은 이 책의 주제의식을 정확히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아름다운 산행’이 보여주고 있는 여덟 색깔의 무늬-꽃, 바위, 섬, 강·호반, 계곡, 산성, 사찰, 단풍·억새-는 다름 아닌 역사와 철학, 사람과 문화, 지명과 풍광 그리고 전설 등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흡사 ‘비빔밥’ 같은 영양가 만점 짜리 인생 길라잡이인 셈이다. 인생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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