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보이] 잔혹하고 스산한 엽기 스릴러
[올드 보이] 잔혹하고 스산한 엽기 스릴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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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드 보이
이 영화의 원작이 일본만화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스토리와 캐릭터가 보여주는 극한적인 분위기가 일본의 엽기 스릴러를 쏘옥 빼 닮았다.

한 시절 일본만화를 무지 즐겼다. [드래곤 볼] [닥터 슬럼프] [시티헌터] [형사25시]가 아직도 생생하다. [시티헌터]와 [형사25시]는 범죄스릴러이다.

[시티헌터]는 코믹터치임에 반해서, [형사25시]는 잔혹하고 스산하다. [형사25시]는 우리가 가히 상상하기 힘든 엽기적인 사건으로 넘쳐난다. 그 범인들이 엽기적이기도 하지만, 그걸 그려 가는 스토리와 그림이 섬세하고 치밀하다.

그 정신병적인 범죄에서 그려지는 잔혹한 장면이 가증스럽게 지겨워서, 편안하게 즐길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그런 스토리를 엮어내고 어떻게 그토록 엽기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건지 놀라웠다.

일본 만화의 외설과 엽기는 그저 그림만 그렇게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게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와 짜임새가 함께 맞물려 들면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마 같은 상상을 그렇게까지 그려낼 수 있는 건지…. 치가 떨리도록 인간이 두려워졌다.

잔혹한 엽기물은 서양의 기계문명이 배설하는 회색빛 어둠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슬프지만 뒤틀린 정신병이다. 개인적인 현상이기에 앞서서 사회적인 현상이다. 사회적인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사회구조적인 억압과 횡포의 감옥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이 자학적인 그로테스크로 폭발한 것이다. 거기에 일본문화의 유별난 섬세함이 스며들면 그 잔혹함이 모골이 송연하게 스산하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이번 [올드 보이]가 그러하다. 김기덕 감독이 보여주는 포악스럽게 짓이겨버리는 잔혹함과는 다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런 미감을 즐기는지 알지 못한다.

내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접어두고, 설사 잔혹한 엽기물의 매니아들이 즐기는 그 비밀스런 미감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김기덕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엽기영화는 그 기괴한 미감을 느껴보는 수준을 넘어서 범죄적인 뒤틀림으로 이끌고 부추긴다. [어둠 속의 댄서]나 [돌이킬 수 없는]처럼 리얼하고 깔끔한 게 아니라, 들쩍지근한 인공조미료를 잔뜩 발라놓은 맛이다. 나는 그래서 그들의 잔혹한 엽기영화가 길을 잘못 들어서고 있다고 본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에 반해서, 뭔가 껄끄러운 예감이 들면서도 [복수는 나의 것]을 굳이 보았다. [공동경비구역]이 좀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복수는 나의 것]이나 이번 [올드 보이]도 기능적 기술로 보자면 잘 만든 영화이다.

그는 상당한 문제의식과 작품 실력을 갖춘 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잔혹한 엽기영화로 인공조미료를 잔뜩 뿌려 솜씨 자랑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 땅의 어두운 그늘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가 왜 이렇게 그런 잘못된 잔혹함에 집착하는 걸까?

그래도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밑바탕에 깔린 깊은 설움과 분노를 보여주었지만, 이번 [올드 보이]에서는 일본사회의 그늘에 숨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흉내내면서, 기발한 역습이나 반전으로 관객에게 ‘공포의 깜짝쇼’를 펼치는 재주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서 무얼 어찌하겠다는 건가! 돈 좀 벌어 보겠다? 그건 아닌 것 같고. 우리 사회에 깔린 잔악한 폭력을 고발해 보겠다? 그건 관객의 눈높이를 무시한 처사이고. 이런 표현양식을 개척해서 우리 영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 그건 남의 손 빌려 코 닦으며 자기 멋에 빠진 자아도취이고. 안타까움에 그의 작품을 한 번만 더 기다려 보겠다.(여섯 감독의 옴니버스 작품 [여섯 개의 시선]에 실린 그를 아직 보지 못했다.)

/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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