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made, handmade ; 손때를 묻혀 가는 삶을 꿈꾸며
homemade, handmade ; 손때를 묻혀 가는 삶을 꿈꾸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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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켠에서 자란 결명자를 따서 그 알맹이 몇 알 넣고 난로에 올려 끓였더니 맛이 아주 그만이다. 어디어디에 좋다며 흔하게 언급되는 약으로서 그 결명자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우리 집에서 수확한 몇 안 되는 농산물이기 때문이다. 씨를 뿌려 가꾼 상추와 달리 뭔가 자라고 있을 때 그 존재를 전혀 몰랐고, 뜻하지 않게 결명자를 얻게 되어 미처 느껴보지 못한 향긋한 茶香을 경험하고 있다.

시골 마을로 들어온 반년 동안 손수 가꾸고 장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포도가 한참이다가 들어갈 끝 무렵 부랴부랴 그걸 사서 옹기에 쏟아 넣고 설탕을 부었더니 한달 쯤 지나 포도주로 숙성되어 제법 때깔이 났다. 걸러진 포도주 양은 많지 않으나, 우리 두 식구의 반주로 애용될 정도의 분위기 메이커이다. 포도 껍질은 버리지 않고 다른 옹기에 묵혔더니 다음에 포도청으로 써도 될 만큼 푹 삭혀 있다. 틈틈이 담궈 본 막걸리, 처음엔 막걸리 식초였다가 이젠 그럭저럭 막걸리 냄새를 풍기고 있어 제조상궁으로 거듭나는 수련의 단계를 밟고 있는 중이다.

가을 햇살이 한참 좋은 10월에 우린 겨울 난방 준비에 들어갔다. 마당엔 햇볕이 따스한데 집안은 차갑고 외풍이 세다. 장에 가서 자그마한 장작 난로를 사서 거실에 설치하고 땔감으론 이곳 저곳에서 나오는 처진 목재를 죄다 긁어오고 갈탄도 샀다.

사람들은 찻집에서 몽글몽글 피워 오르는 따스한 온기를 부러워들 하겠지만 그 온기를 만들기까지 일상의 고단함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마다 재를 떨어내고 불을 지펴야 하는데 온 집안 가득 연기만 피워 혼자 있을 땐 난로 피우기를 포기한 적이 더 많았다.

불이 붙었다 해도 지켜보고 때맞춰 장작을 넣어야 하고 기왕이면 불씨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다시 불을 지피기 좋으니 불씨를 지키는 조선의 여인이 돼 버렸다. 집안 가득 날아다니는 불 먼지와 3일에 한번씩 빨아도 금방 시껌해지는 실내화 같아 대기는 이 그윽한 온기를 받자면 당해내야 할 번민이다.

이런 고통을 딛고 피어난 불꽃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은 작은 진돗개 달구 녀석이다. 추워질 무렵 아파서 잠깐 현관에 재웠더니 저녁이 되면 으레 들어와야 하는 줄 알고 난로 불을 쳐다보며 자울자울거린다.

하루 내내 무얼 그리 꼼지락거리며 지내는지 아침에 눈 떠 저녁에 잠들 때까지 나는 잠시도 한가로움에 무료해 본적이 없다. 아파트 살 때는 툭하면 TV를 켜 놓거나 낮잠으로 소일했는데 농사를 짓지 않는 아낙이라도 마당엔 꼭 꼼지락거릴게 있어 반나절이 홀딱 가 버리고, 놀고 있는 항아리에 뭘 채울까 궁리하면 하루 일이 돼 버린다.

재봉틀이 쉴새 없이 돌아가는 것도 우리집 풍경이다. 생활 한복이 흔해졌어도 쉬이 입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보통 사람들에겐 소구력이 없겠지만 우리 남편은 그걸 즐겨 입는 편이고 내가 많이 독려한다. 내가 만들어 준 바지와 남방 위에 조끼를 가으내 맛있게 입더니 이젠 두툼한 저고리를 곧잘 입는다.

그리고 추운 날 입을 두루마기를 작업 중이다. 전통 한복이 아니니 부담스럽거나 거추장스럽지 않고, 편하면서 멋스러움을 갖도록 감물을 들인 천으로 재단하고 재봉하여 거의 완성에 즈음했다. 가급적 불필요한 옷들 사들이고 쌓아두지 말고 손때가 묻은 것들로 채워보자고 시작한 작업이다.

곧 들어갈 재봉 아이템은 버선이다. 여학교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만들어 봤음직한 것이고 언제 이걸 다시 사용하나 기약 없었던 것이 요즘은 편하게 신고 벗을 수 있도록 개량 버선이 나와 있어 누빔 천으로 만들면 집안에서 실내화 대용으로 신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산자락이라 내복도 입어야 하고 잘 때도 양말을 벗기 싫을 만큼 추워 두툼한 버선은 필수품일 듯.

여름부터 부산하고 번거로운 일상 속으로 헤엄쳐 살아오면서도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내 손으로 한다는 것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번거롭게만 들일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삶의 터까지 손때를 묻혀 가고 싶다. 조금씩 더 번거롭고 남들이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하나하나 익숙해 가면 내 사람은 더 풍요로움으로 채워지지 않을지.

내 손으로 일궈 가는 또 다른 보람은 고마운 분들께 내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은 보시를 할 수 있어 요긴하다, 물자가 흔한 세상에 시간과 품 들여가며 만들어 낸다는 게 불필요한 작업이라 여기겠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정성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난로를 들이면서 장작을 팰 도끼가 필요해서 장에 가면 살 수 있겠다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호인들이 활동하는 카페에서 방을 띄웠더니 의령에서 자연의학을 공부하시는 선생님이 도끼를 보내 주셨다.

그 감사함을 어찌할 줄 몰라 감물 천에 누빔 안감을 대어 조끼를 만들었더니 그럭저럭 폼은 난다. 이번 주말엔 그분과 조우해서 조끼를 입혀드릴 기대에 시간 가는 게 행복하다. 결코 솜씨 좋은 작품은 아니나 옷을 만드는 내내 그 분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만 갖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어서다.

내 손으로 가꿔 가는 삶, 느리고 더디고 번거롭지만, 빨리 갈 필요가 없다면 우리 할머니가 살았던 시절처럼 그 옛것을 많이 향유하며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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