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송두율 그를 가두라”
“차라리 송두율 그를 가두라”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3.10.1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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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때아닌 ‘빨갱이’ 사냥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경계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월선’이 불러온 분단시대의 비극이다. 송두율, 그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도시’야 말로 그 인생이 숙명처럼 자리를 잡은 ‘망명정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철학적 자유인’일 수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현실적 경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였지만 지난 37년 동안 한시도 ‘언젠가 돌아갈 고향의 희망’에 대해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37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그를 ‘경계인’에서 ‘회색인’으로, 급기야는 ‘빨갱이’라는 이름의 큼직한 ‘주홍글씨’를 가슴에 낙인찍었다.

‘북한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
어쩌면 김철수와 송두율은 동일인 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굳이 영화 ‘쉬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송두율과 김철수’는 남북분단 구조가 만들어 놓은 ‘히드라’같은 존재다. 그것은 자연인 ‘송두율’의 책임이 아니다. 그 역시 ‘희생양’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남도 북도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조국’이었다는 사실에 충실했다는 사실뿐이다. ‘남은 선·북은 악’이라는 이항대립적인 분단의 신화와 우상이 만들어낸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난 98년 5월11일 한겨레 창간 10돌을 기념하는 대담에서 황장엽은 이영희에게 자신의 남한 행을 두고 ‘처음에 망명이라고 쓰지 말라’고 했다. ‘자기조국에 왔는데 무엇 때문에 망명이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송두율이 김철수’임을 폭로했던 황장엽의 조국과 송두율의 조국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황장엽에게 허락되는 관용과 자유는 왜 송두율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가. 30여년 전 이른바 주체사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황장엽과 송두율 중 누가 더 한국사회에 해악을 끼쳤는가. 한국사회의 수구꼴통들은 진정 아무런 분별능력도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송두율을 감옥에 가두라. 환갑을 지척에 둔 노학자의 마지막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지 마라. 이제 추방된다면 그는 남으로도 북으로도 돌아갈 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영원한 배외자로 이국을 떠돌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영어의 감방에서나마 지난 37년 동안 지고 다녔던 저주의 주술로부터 비로소 해방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두율 그 한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남과 북의 통일은 없다. 30여년 이상 경계인으로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죄 값을 치렀다. 그가 30여년 이상 몸담았던 경계도시 독일도 지난 90년 통일로 하나가 됐다. 굳이 그가 죄 값을 치러야 한다면 이제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이 분단의 땅에서 ‘남과 북’을 잇게 하는 수고로움으로 대신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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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2004-08-03 09: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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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늦게 이제서야 읽어봤는데
참 글을 잘 쓰시네요.
글을 잘 쓴다는 건
생각이 참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생각의 기본구도 말입니다)

현실세계의 냉혹한 권력 균형관계에 대한 이해가 가미된다면
보다 더 깊이가 있는 논평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외람되게 덧글로 달아봅니다.

양심의 자유가 꽃으로 필 수 있는 곳은
현실관계 속에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자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죠.
대학교 실험실이라든가, 연극무대라든가, 소설이나 영화속 인생이나
철학 강의실 내부 같은 곳 말입니다.

그러나 국가경영은 그런 곳만을 상정해서 "관리"할 수가 없는 범위이고,
"자유"라는 가치에다 "책임"이라는 범위를 설정해야 하는 곳도 있고
내 양심과 다른 사람의 양심이 충돌하는 이해관계 대립 상황들을
조정 중재 때로는 통제해야 하는 현실 변수들이 전개되는 영역이 되죠.

이 사람을 철학자로 보는 사람들은 그를 그냥 냅둬유~ 라고 하겠고
이 사람을 노동당원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를 그냥 둬서는 안된다고
하는 시각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있는 겁니다.

노동당원이면 탈당 '선언'이라도 하고 실수였다고 공개 사죄를 하면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던 모양인데
(그보다 더 큰 고수였던 황장엽 씨도 받아줬던 걸 보면 그럴싸 하건만)

노동당원이냐 아니냐 하는 껍데기 옷자락이 그게 대체 무슨 중요한
허접 검불같은 대수냐고 - 고차원적으로 노는 바람에
이게 연막전술인지 국가를 깔보는 건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교묘한 논리로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슨 식으로든 답안지 정리가 필요한 거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존립 기반을 흔들지 말아야 하는 범위가 설정되는 게 현실이죠.

그 양심과 현실의 간격 사이에서 자기 위치를 분명하게 잡아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송두율 씨는 자기 좌표와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여러 가지 쓸데 없는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는 관념상의) 논리만
뱅뱅 돌리고 있는 것같이 보이네요...

경계인이라 ....

그건 아무리 봐도 "이긴 사람 우리편" 하는 애들 심보같은 생각 수준인
것만 같아서요. 남한이 가난할 땐 북한으로 선을 대고 있었고
북한이 가난할 땐 남한에 선을 대고 있고 싶은 심보 ....

그래서 누군가 말한 적이 있죠.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은 영원한 학생 수준의 성숙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누가 그랬더라 ...

가물가물...

황장엽의 조국과 송두율의 조국은 객관적 실체로서 동일체이지만
황장엽과 송두율의 차이는 어느 쪽 체제가 더 국민(인민)들에게 바람직한
국가경영 체제냐 하는 생각과 관점의 표현을 [지지 선언을]
분명히 했느냐 애매하게 꼬리를 빼며 돌려치느냐 하는 차이가 있는 거죠.

정치 일선에 서본 사람과 연구실에서 나불거리던 사람의 차이가 되죠.

책임을 떠맡아보던 사람과 책임 질 부담이 없었던 사람의 차이도 되고..

가물가물....

가물가...

물...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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