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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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었어요. 우리 예쁜 우현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말로만 듣던 교통사고. 제게 다가왔네요. 정말 순식간에. 멍하다는 표현 있잖아요. 아픔이 아예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유치원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건너편 피아노 학원에 갈 요량으로 길을 건넜겠죠. 맞은편에서 차가 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지금도 우현이가 차와 부딪쳤을 때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정말 가슴이 까마득하게 밀려나는 느낌을 받아요

핏빛으로 물든 흰 블라우스. 응급처치용 붕대로 막아놓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얼굴. 구급차 안에서 의식 확인을 위해 한번씩 이름을 불러주는 것말고는 우리 부부가 우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무기력감이란.

부산한 응급실 소음에 희미하게 “엄마, 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사고의 주범인 양 원망하던 하느님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제서야 독한 에미처럼 꾸욱 참고있던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흐르더군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 재롱에 웃음 짓고 날마다 육아일기를 쓰고 예쁜 옷을 고르는 그런 재미있는 일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부부에게 하늘은 한 생명을 낳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존엄하고 큰 사명인가를 똑똑히 깨닫게 해주었지요.

한 달간의 입원생활을 우현이는 7곱살 아이 같지 않은 의젓함으로 잘 버텨냈어요. 의사선생님 간호사언니 모두 우현이의 인내와 당참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구요. 그 작은 몸이 다시 생명을 불을 지피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 재롱에 웃음 짓고
날마다 육아일기를 쓰고 예쁜 옷을 고르는
그런 재밌는 일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부부에게
하늘은 한 생명을 낳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존엄하고
큰 사명인가를 똑똑히 깨닫게 해주었지요..."

4달이 지난 지금도 길을 건널 때 자기도 모르게 고사리 같은 손에 땀이 베일 정도로 내 손을 꽈악 잡고 건넌다든지 또 멀리서 차 소리만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벽에 딱 붙어버리는 딸을 보면서 “그래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평생 한번 경험할까 싶은 큰 사고를 당했으니.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잊어버리렴”하고 맘속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군데군데 얼굴흉터랑 코뼈수술로 조금은 달라진 인상 따윈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볼 때마다 가슴은 쓰리지만 우현이의 해맑은 미소가 또 다시 쓰린 가슴을 달래주거든요. 사람은 살다보면 아픈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가슴에 담는데요. 그 만큼 나쁜 기억은 우리 삶에 별 볼일 없는 거란 뜻이겠죠.

지금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이 아픈 기억이 정말 시간의 저편으로 잊혀질지 의문이고 아직도 가끔씩 불쑥 고개를 드는 교통사고 후유증이라는 단어가 나를 자유롭게 놔주질 않지만. 지금은 그저 우현이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나를 겸손한 어미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준 내 딸에게 고마울 뿐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느끼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바로 오늘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된 거지요.
내일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린 오늘 사랑해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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