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슬픈 실망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슬픈 실망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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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여름 가을 겨울
공포영화는 정말 싫다. 공포라는 게 우리 삶에 깊이 숨어 있는 어떤 비밀을 들추어주기에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잔혹하고 섬뜩한 장면에 베인 가슴앓이를 견디기 힘들다. 어느 날 텔레비전 영화 소개에서 [섬]을 보았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엽기적인 잔혹 장면에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몸서리쳤다. “어떻게 저런 장면을!” 더는 이어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려 버렸다.

김기덕 감독, 그가 화제로 올랐다. 관객을 많이 끌지 못하지만, 그의 독특한 관점과 영상이 의미 있다며, 그의 매니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 감독과 그 매니아들의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그렇게 고상하게 놀 것 없다.

음식요리를 닭 돼지나 쌀 배추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목숨이 이미 잔혹한 엽기에 기대어 질기게 이어 붙어 있지 않나? 어디 요리뿐이겠는가?” 잔혹 영화를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그의 영화를 한 번 봐 보기로 했다. [수취인불명] 삼류인생의 어둠 속에 널려있는 폭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그걸 끝까지 밀고 갔다. 머리끝이 쭈빗토록 노골적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 [나쁜 남자] [해안선]을 일부러 피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분위기를 확 바꾸어 ‘불교의 업보’를 소재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만들었다. [달마 동쪽]에게 큰상을 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을 네 개나 받았단다. 호기심이 부쩍 일어났다.

그의 잔혹한 미감이 너무 처참하여 감당하기 힘들지언정, 얼마쯤 문제작이라고 보았기에, 그의 작품 역량을 낮게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서 그의 작품 역량이 자못 의심스러웠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거짓말] 그리고 임상수 감독의 [눈물]이 퇴폐적이고 싸가지 없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사회구조적 횡포를 개인의 퇴폐에 실어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비판”의 문제작으로 보았다가, [성냥팔이소녀의 재림]과 [바람난 가족]을 보고 그들의 비판의식이 지적 허위에 차 있으며 작품 역량도 떨어지는 ‘사이비’라고 여겼다. 이번에 김기덕 감독에게서 그걸 느꼈다.

지적허위에 찬 그들의 비판의식- - - - - - - - - - - - - - - - - - - - - -
잔가지 이미지가 상투적이고 얄팍하게 무성하여
제법 쓸만한 줄기 이미지를 허접스럽게 뒤덮어버렸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숙성된 내공이 딸린다


좋은 영화는 시나리오에 담긴 영상적 이미지를 다루어내는 솜씨에 달렸다. 그건 삶의 껍데기에 그려진 무늬를 얄팍한 감각적 순발력으로 거창하게 꾸며대느냐 아니면 삶의 굽이굽이에 새겨진 애환을 깊이 숙성된 안목으로 은근하게 우려내느냐 이겠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빗댄 삶의 여정’ 작은 문과 호수물로 속세의 단절을 둔 절집 ‘업보의 돌덩어리’라는 큰 줄기 이미지에 이런 저런 잔가지 이미지를 덧붙인다. 그런데 그 잔가지 이미지가 상투적이고 얄팍하게 무성하여 제법 쓸만한 줄기 이미지를 허접스럽게 뒤덮어버렸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숙성된 내공이 딸린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 동쪽]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많이 뒤떨어진다.

그래서 남는 건, 깊은 산 속 호수 위에 고즈넉하고 청아하게 앉아 있는 절집 뿐이다. 가히 동양의 환상적인 신기루였다. 그 신기루에 실려 세상사 홍진을 털고 단정하게 누워서 한 줄기 바람처럼 적멸하고 팠다.

작품성이 그리 높지 못함에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네 개의 상을 받은 건,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처럼 서양 사람들이 동양문화에 갖는 호기심에 이런 동양의 환상적인 영상과 이미지에 힘입은 것 같다. 우리는 서양문화 사대주의에 홀랑 빠진 게 문제이고,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풍물을 호기심의 수준에서 가늠하는 게 문제이다.

유난스레 요즈음 들어, 우리 사회와 문화에 ‘비판적인 의식이나 미감’을 가진 사람들의 겉과 속을 상당히 의심한다. 그 허위의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더욱 그렇다. 인정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슬픈 건 아니다. 그런 사람이 버젓이 설칠 수 있다는 게 슬프다.

/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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