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 짚고 경주 구경하기
목발 짚고 경주 구경하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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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어느 빛 좋은 날. 남편과 여행이라는 것을 가기로 했다. 역사스페셜을 즐겨보고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던 나는 경주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고3 수학여행 때 남들 다 가는 경주를 왜 우리학교는 그냥 건너 뛴 걸까?) 2박3일로 일정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이 얼마만의 여행인가? 가슴은 부풀어오르고, 얼굴에는 미소가 저절로….

약간은 지루한 여행 끝에 경주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내려 숙소로 향하는데, “오잉, 무슨 능이 이렇게 많지?” 그렇다. 경주는 온통 조그마한 동산처럼 보이는 능이 여기도 저기도, 앞에도 뒤에도 널려 있다. 무덤이래도 곡선이 완만하고 예뻐서 무서운 느낌이 들기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인터넷에서 찾은 외국인 배낭자들이 많이 묵는다는 민박집은 작지만 예쁜 마당이 있는 한옥이다. 주인아주머니도 친절하시고, 분위기 딱이다. 내일 일정을 대강 정해놓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세면대로 향하는데, 한 백인이 “하이” 한다. 깜짝 놀라서 대꾸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맘 단단히 먹고 다시 나가서 “good morning”했다. 촌스럽긴. 그는 한국의 아침이 마음에 드는지 마당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보내고 있다.

경주를 보려면 먼저 박물관부터 봐야 한다길래 책으로 미리 공부한 박물관으로 향했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광주박물관과는 규모나 양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앞마당과 뒷마당의 유물도 엄청나다. 본관이 수리 중이어서 많은 유물을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꼬박 4시간이 걸렸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까치발 딛고 서서 뒷모습을 보이는 사자와 간단한 선으로 웃는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릇이다. 그 모양새가 신선해서 한참을 보고 서 있었다. 그 당시 경주사람들은 참 해학을 좋아한 것 같다.

다음은 안압지, 사건은 여기서 벌어진다. 남편 사진을 찍어 준다고 촐랑대며 뒷걸음치다가 발이 완전히 뒤집혔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현기증이 나서 안면몰수하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버렸다. 그러길 5분. 괜찮은 것 같아서 계속 둘러보려는데 점점 더 통증이 심해진다. 하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접고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진단결과 뼈에 금이 갔다고 한다. 반 깁스하고 나오려는데, 목발을 준다. “흑흑∼ 그럼 구경 포기하고 광주가야 할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죠. 되도록 많이 움직이지 말고 다니도록 해보세요. 광주가서 다시 깁스 하시구요.” 그 의사,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한다.

그리하여 목발 짚고 경주구경이 시작됐다. 밥 먼저 먹고(역시 음식은 광주가 최고야) 식당에서 가까운 첨성대를 향했다.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를 30분은 걸려서 간 것 같다. 체중을 한 발에 실으니 왜 이리 힘들던지. 두발로도 지탱하기 힘든 몸무게를 한 발로 지탱하려니 땀이 다 난다. “어? 그런데 첨성대가 기울었네” 이유인즉 6·25때 근처에 포탄들이 떨어져 그 충격으로 기울어 졌다고 한다.

다음은 천마총, 입구에서 천마총까진 왜 이리 먼 거야? TV에서 본 금관은 꼭 봐야하는데. 사람들마다 꼭 한번씩 쳐다보고 간다. 움직이기만도 힘들지만, 이미지 관리는 해야 하니 괜찮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유명한 돌무지 덧널무덤도 구경하고, 다음 숙소로 향했다. 불국사는 포기해도 석굴암은 봐야 하겠기에, 근처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숙소에 들어가서 쉬려다 이번엔 남편이 벗어놓은 안경을 깁스한 발로 무자비하게 밟아버렸다. 발을 크게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냥 옷을 밟았더니 그 밑에 있었던 것이다. “맞춘 지 얼마 안됐는데 흑흑∼” 조금 있으려니 남편의 몸에 열이 있다. 몸살이 난 것 같다고 한다. ‘휴∼ 이 웬 재난이란 말인가?

정말 포기하고 가야하나?’ 일단 잠을 자고 다음날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다행히 괜찮다고 해 석굴암을 구경하고 신라역사과학관으로 향했다. 사실 석굴암을 들어가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진수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석굴암을 과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신라역사과학관으로 가는 게 낫다. 그 유명한 역사스페셜의 장면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집으로 오는 길, 이것으로 우리의 여행이 다 끝난 걸까? 아니다.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탔는데, 중문단지에서 국제행사가 있다고 한다. 덕분에 버스는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상황. 버스에서 발을 동동 굴러봤자, 예약해 놓은 버스는 이미 떠났고(경주발 광주행 버스는 오전, 오후 딱 두 대 밖에 없다) 우리는 대구로 향하기로 했다. 대도시니까 광주 가는 버스가 많겠지. 대구에 내려서 터미널까지 버스시간에 맞추기 위해 목발을 짚고 뛰어야 했다.

다행히도 광주행 버스를 탈 수 있었고, 사건 사고 많은 경주여행은 이렇게 해서 끝났다. 하지만 경주는 친절한 사람들과 멋있는 유물이 있어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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