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꿈꾸다
첫사랑을 꿈꾸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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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언제였나, 어쩜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상상속인 것 같기도 한 그때. 무대는 캠퍼스, 아직 다소 서늘한 초봄. 한차례 비가 내렸고 덕분에 초저녁 세상이 막 씻긴 아이 얼굴 같다. 유혹적이다. 왠지 모르게 공간 속이 아련한데 그것이 초봄 습기로 인한 옅은 안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후에 내 상상 속에서 덧대어진 무대장치인지 확실치 않다.

무대 위엔 달랑 주인공 둘, 여자와 남자, 걷고 있다. 둘의 걸음걸이가 마치 징검다리나, 난간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긴 침묵을 여자가 먼저 깬다. “잘 있었어요? 좀 야윈 것 같네요.”
남자가 받는다. “넌 많이 이뻐졌다.”

여자 “………”
남자 “임마 왜 그렇게 얼굴을 안 비쳤냐.”
여자 (알고 있었구나! 많이 보고싶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며칠을 집에 콕 박혀있었지만 아침에 눈뜨면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당신이 늘 함께였죠. 가슴이 어찌나 아프던지.)
남자 “실은 오래 전부터 할말이 있었다.”
남자 “나….”
여자 “……”

남자 “나…실은….”
여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다)
남자 “나…실은…오래 전부터….”
여자 (허걱!)
그는 마치 여자가 어려서 봤던 전쟁영화 총 맞은 군인처럼, 핀 뽑힌 수류탄처럼 벌써 결론을 예고하고도 한참이나 애를 볶다가 드뎌 죽었다. 아니 터트렸다.

남자 “나, 실은 오래 전부터 너 봐.왔.다. 많.이. 보.고.싶.었.다.”
순간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술자리를 피해 아무도 모르게 슬쩍 빠져나왔던 나를 그가 어찌알고 따라 왔는지. 어떻게 그와 내가 함께 걷게 되었는지.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지. 그는 나를 보고 있었던 거다.(내가 그랬던 것처럼)

살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황홀한 고백’ 30대의 내가 20대 나를 추억할 때 늘 가장 큰 미소를 머금게 하는.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가 꿈을 꾼다. 그런 벅찬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여자의 눈이 꿈에 젖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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