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말 사잇길
전라도 말 사잇길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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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말의 무차별한 공격... 마지막 이야기 환경과 육체를 잃은 말은 자꾸 관념을 지향한다. 한글의 처음이 발음기호이었는데, 어느덧 한글은 맞춤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인 말이 되었다. 아니 살아있는 말에서 책 속의 글로 변해 버렸다. 다시 구어체 혁명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군사독재는 많은 부분에서 획일화를 강조하였다. 복장의 획일화, 두발의 획일화, 그리고 표준말의 강조는 말의 획일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말의 표준화가 가져다 주는 이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표준말을 강요하면서, 이전에 살아있던 우리나라 각 지역의 말을 채취 수록하는 노력을 얼마만큼 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영어의 어휘가 지금처럼 풍부해진 것은, 영국 각 지방에 흩어진 말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일생이 걸린 작업으로. 그처럼 우리도 각 지방의 말을 모아 '우리말 사전'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풍부한 어휘를 가질 수 있었을까?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받게 된 말의 충격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환경이 다르면 말이 다르고, 말이 다르면 사고방식이 다르다.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프게 다가오는 추억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혼식검사에 얽힌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혼식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쌀밥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논리로 7대3(쌀 7, 보리 3)의 비율로 혼식할 것을 강제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몇 친구에게는 그 혼식 검사라는 것이 지극히 사치스러운 행위로 보였다. 아니 쌀은 구경하기도 힘든 우리들에게 혼식이라니! 선생님은 혼식검사가 있는 날이면 모두의 도시락을 열게 한 다음, 7대3의 비율에 맞게 도시락을 싸 왔는지 검사를 하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도시락을 싸가기도 힘든 형편이었고, 싸 가지고 가 보아야 보리밥만 싸가거나, 남 보기에 우세스럽다고 보리밥을 담은 다음 보이는 부분만 쌀밥을 씌우는 식으로 도시락을 싸가야 했다. 이른바 '이대흠식' 도시락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뒤가 막힌 담임 덕택에 나는 번번이 혼식 검사에 걸려 매를 맞아야 했다. 어떨 때는 맨 위에 보이는 쌀밥을 보고 혼식을 해 오지 않았다고 맞았고, 어떨 때는 꽁보리밥만 싸 온 덕분에 맞아야 했다. 그리고 가장 기막혔던 경우는 도시락 쌀 형편이 못돼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하였는데, 혼식검사 때 매 맞은 것에 반항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는 오해를 받아 매를 맞았던 경우였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나왔다. 나의 결백을 확인하지 않고, 마녀사냥 하듯이 자신의 추론에 의해 체벌을 하였던 선생. 나는 고픈 배에 울면서 매를 맞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추억은 말에 관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여름방학 숙제에 식물채집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방학 기간 내내 100종의 식물을 채집하였다. 방학이 끝나고 저마다, 해 온 숙제들을 보여주며 방학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의 식물채집 숙제는 단연 돋보였다. 누가 보아도 내가 해 온 '식물 채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종류의 식물이 채집되어 있었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숙제에 따른 시상식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식물채집 우수상은 다른 친구에게 돌아갔다. 나는 이유를 몰라 고민하였다. 내 식물채집이 왜 우수상을 받을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후 나는 정답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말' 때문이었다. 내가 해 온 식물 채집은 전라도에서 부르는 식물의 명칭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고, 친구 녀석이 해 온 숙제에는 식물도감의 명칭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가령 내가 해 온 식물 채집에는 독새, 짜구때나무, 방동사니 이런 이름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도 그 때 내가 했던 식물채집 숙제를 떠올리면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상은 받지 못했어도 보관 해 둘걸. 그랬다면, 생생한 전라도 어휘들을 상당히 건질 수 있을 것인데…. 그저 아쉬울 뿐이어서, 몇 십년이 지난 후 다시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 나는 요즘 전라도 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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