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숲을 산책하다
기억의 숲을 산책하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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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김연수 지음, 문학동네 2002)

아마도 무릎까지 눈이 쌓이던 어느 겨울날이었을 것이다. 제설 작전을 마치고 들어 온 내무반 관물대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 안에는 당신의 군대시절 이후 30년만에 쓰는 편지라는 수줍은 고백과 서둘러 감추던 어색함이 들어 있었다. 그 편지로 나는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철책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사선을 넘나들었고, 눈 밭 위에는 남쪽으로 뛰어 간 노루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지만, 그 때 이후로 다시 봉투를 열어 본 적은 없다. 다시 재해석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은 해석일 수밖에 없으며 회상과 추억의 두터운 옷을 껴입을 수밖에 없을 테니, 김연수의 이 소설집은 그렇게 채색된 기억의 숲을 산책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성장소설쯤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 소설만큼은 꼭 연필로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은 연필이라는 추억의 재생물과 더불어 왠지 그 추억은 조금씩 각색되거나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필은 지우기가 쉽다. 그리고 다시 덧쓰면 그만이다. 언제든 추억은 재소환되어 다른 색의 옷을 입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추억이란 것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뉴욕제과점'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처럼,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군대 시절에 받은 아버지의 편지에는 그런 구절은 없었지만, 징글맞고 서먹서먹한 수컷들의 세계에 서있는 아버지의 등에 드리워진 어떤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한번도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던 인생의 어떤 불빛중의 하나를 어렴풋이 본 기분이었다.

세상에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왜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 끝끝내 알 수 있을까? 내 몸을 거쳐갔던 흐린 그림자들의 아우라를 나는 만져볼 수는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비추거나 스쳐갔던 어떤 불빛과 마주할 수 있다면, 나의 키는 또 한 뼘 정도는 높아질텐데 말이다. 작가가 자꾸 추억의 이름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거친 불빛들의 그림자들을 일별하면서 성장을 위한 마지막 체세포분열을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어릴 적 첫눈에 반해버린 '정인'이라는 여자아이와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아니 그 사랑이 그때에도 푸른빛이었고 바다였고 바다의 한때나마 꿈이었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첫사랑) 또 그가 삼촌을 따라간 사냥에서 무섭게 돌진해오던 멧돼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면, 그래서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의 인생을 영웅담으로 들었다면 그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그리고 그에게 노란 연등처럼 높이 걸려 사라져 버린 낙태의 기억이 없었다면(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뉴욕제과점의 ‘기레빠시’로 아직도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면(뉴욕제과점), 이 작가는 노트북 앞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로 다시는 변하지 않는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삶이 언제 완벽하게 무언가를 전달해 준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언제나 아스라했으며 어렴풋했었다. 기억의 숲에서 산책을 하는 일은 그런 기억의 불완전함이 건네는 말에 대한 답일 것이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다 놓고서는,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어떤 순간들의 아픔이나 눈물이나 슬픔들이 그의 키를 한 뼘씩 키웠다고, 어쩌면 자신을 버리는 과정이 성장의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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