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는 사평역(沙平驛)으로 가자!
5월에는 사평역(沙平驛)으로 가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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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에 발표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참혹한 광주민중항쟁을 겪고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삭여야 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외롭고도 애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서정이 서사보다도, 침묵이 그 어떤 선동보다도 더 강렬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이 한 편의 시에서 느꼈다.

우리 경상도 사람들은 이제 전라도에 대해 공장을 다 뜯어갔다는 둥, 김정일과 손잡고 퍼주기만 한다는 둥 이러쿵저러쿵 그만 떠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든 너무 큰소리로 너무 당당하게 떠든다. 그게 솔직함일 수도 있지만, 이제 웅숭깊은 전라도의 마음을 한번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자.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상처받은 그들의 내밀한 언어에 이제 귀를 좀 기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


2. 윗 글은 2002년 6월호 월간 '인물과사상'에 실린 소설가 김하기의 "노풍에 의해 붕괴되는 지역감정"이라는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리고 앞 부분에 소개된 시는 곽재구 시인의 그 유명한 '사평역에서'라는 시이다.

이 글에서 김하기는 '노풍의 정체에 대해 한마디로 지역감정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의 선택'라고 진단했다.
지역감정, 지역갈등, 그런 거 없이 우리 선거 한번 해보자는 사람들이 일으킨 바람이고 대선이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실제 대선이 그렇게 치뤄졌는가?
우리는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라도 시인의 이 아름다운 시와 경상도 소설가의 이 아름다운 감상을 다시 들어야 한다.

3.사평역은 현실의 기차역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안주할 수 없어 서성거리며 현실에서 떠나고만 싶어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역이다.
아직도 그들은 사평역에서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처럼 시린 가슴속의 말을 침묵으로 대신하면서.
지역감정이 한 뼘만큼 허물어진 올 5월에는 우리는 사평역으로 가고 싶다.

서정이 서사보다 더 강하고 침묵이 선동보다 더 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광주의 거리를 걷고 광주의 식당에서 전라도 김치에 밥를 먹고 광주의 벗들과 함께 술을 나누며 우리는 광주의 마음에 귀기울이고 싶다.
그럴 때 김하기가 소망하는 대로 지역감정은 또 한 뼘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올 5월에는 사평역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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