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내놓고 나니 행복합니다-하정웅과 광주사랑
모두 내놓고 나니 행복합니다-하정웅과 광주사랑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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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미술관에 소장품 700여점 기증한 하정웅씨/ 재일교포 2세 '설움' 교사 미술가 꿈 접어/ 사업으로 큰돈벌어 그림 사모으기 시작/ 한 스님 '더 큰 행복 원하면 한손 비워라'조언에/ '버리는 삶' 인생철학 삼아 실천/ 평생 모은 평화 인권 역사 소재 미술품들/ 빈약한 '예향 광주' 안타까워 기증 결심/ '20세기의 기록' 더 많은 이들 공유했으면/ '내것'에서 '광주시민의 것'돼 더없는 기쁨//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세상에 태어났다가 결국은 허무하게 죽는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풀이한다. 글쎄, 죽음 그 자체가 허무함인 것을.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라는 허무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해서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행복함으로 여긴다. 모두가 그럴까. 아니 가진 만큼 이를 나누고 베푸는 것으로 행복한 사람도 있다. 한국에, 광주에, 문화를 듬뿍 심고 있는 재일교포 하정웅씨(河正雄·62·일본 거주)의 삶이 그렇다. 그가 심은 문화란 정신적, 물질적 문화를 모두 포괄한다. 하씨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6백83점을 기증했다. 지난 16일에는 일본에서 평화의 상징이 되고 있는 감나무를 광주 땅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직접 감나무 묘목을 들고 광주에 왔다. 그림 6백80점을 모으려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야 할수도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땅의 정서를 십분 헤아린 것도 아닐텐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내 재산을 아깝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그의 조국사랑, 광주사랑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됐을까가 궁금했다. 참고로 그의 선친이 전남 영암 출신이다. 그는 "이런 일 하는 사람 많습니다. 한국에도, 또 광주에도 많이 있을 겁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 아닌데요" 라고 운을 떼면서 "나는 언제, 어디서든 버린다는 각오로 삽니다. 그게 내 철학입니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여기서 '버린다'는 의미가 심오하다. 그의 철학은 '공수래공수거'의 실천이다. 그는 재일교포 2세로 일본 땅에서 태어난 설움이 '무지 컸다'고 회고한다. 그의 제1의 꿈은 교사였다. 그리고 미술가. 변호사도 되고 싶었다. 일본은 외국인에게 이런 것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도 울분이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 재일교포라는 민족 차별까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그는 스물네살 때 전자제품 대리점을 열면서 돈맛을 알게 된다. 그 뒤 부동산 임대업으로 직업을 전환, "무지막지하게 돈 벌었다"고 말한다. 그 돈으로 미술교사가 되어 그림을 그려보려던 자신의 꿈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미술가의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한다. 대리만족, 그런 것이었다. 훗날 미술관 건립을 하겠다는 새로운 설계를 하면서. 재일교포 1세인 진화황의 작품이 그의 수집품 1호. 주로 재일본 한국작가의 그림에 애착을 가졌다. 그러기를 10년여. 서른다섯 나이에 갑자기 사고를 당해 정신신경이 마비되는 혼수상태 생활을 2년 지낸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용안사(교또 소재)의 스님과 만난다. 그 스님은 하씨의 손을 보고 "당신의 두 손엔 행복이 넘쳐난다. 그런데 지금도 당신 앞에는 많은 행복이 놓여있다. 이를 더 쥐려거든 한 손의 것은 버려라. 그러면 그 빈 손에 더 좋은 복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를 실행한 것이다. 그의 해석은 이렇다. "두 손에 가득 움켜쥐고 있으면 돌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방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길에서 넘어졌을 때 두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다간 손에 쥔 것도, 건강도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스님의 조언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사회봉사, 사회환원을 자신의 철학으로 세우고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베풀면서 살고 있다. 평생 아껴 모은 그림 수백점을 광주에 내놓은 것도 그 실천의 하나다. 그 베풂의 대상을 광주로 선택한 것이다. 아깝지 않았을까. "만족스럽습니다. 내가 소유했던 재산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내 인생입니다." 거기에 바람이 있다면 광주시민이, 그리고 한국인 모두가 그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광주시립미술관에, 광주시에 기대하고 있다. 그 바람이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는 여기서 인생이란 모든 게 '인연'이라고 화두를 끌어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광주와 맺은 첫 인연은 시각장애인들과 만나면서부터다. 1981년 자신의 소장 미술품 진화황의 한국 순회전(서울, 대구, 광주)을 기획, 광주에 왔다. 호텔에 묵었는데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집요한 요구로 안마를 받으면서 이들과 친해진다. 그들의 장애를 하씨는 지나치지 못했다. 당시 안마비용 5천원에 1천원을 더 얹어주면서 그 1천원에 조건을 걸었다. 반드시 갹출해 돈을 모으라고. 그로부터 8년 후 광주시 사동에 맹인복지회관 건물을 신축하기에 이른다. 물론 광주시의 지원을 받았지만 억대의 땅값 등은 하씨가 재일교포 사회에서 성금으로 모았다.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그는 광주를 56번 왕래했다고 기억한다. 그들과는 물론 지금도 왕래한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섞여있음도 강조한다. "그러는 동안 광주를 알게 되는데, '예향'이라는 슬로건만 있지 내용은 빈약한 게 내겐 '슬픔'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선친의 고향과도 인접한 광주. 안에서도, 밖에서도 예향이라고 칭한다. 예향의 도시에서, 지역문화의 얼굴은 미술관으로 상징된다. 광주시립미술관이 그 상징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빈약했다. 광주의 미술가들과 만나면서 미술품 기증을 결심하고 실천한 것이 오늘에 왔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작품들을 '콜렉션'이라 칭한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의 기증작품 전시장 명칭도 '하정웅 콜렉션'이다. 재일교포 작가를 비롯, 현재 한국·일본에서 활동하는 신진 미술가들의 작품이 모두 들어있다. 거기 담긴 의미가 깊다. 1천점에 이르는 그림의 내용들이 그렇게 다양하다. 평화, 인권, 역사, 문화예술까지 모두 20세기의 기록이다. 21세기에 사는 후손들이, 광주시민들이 20세기 미술을 통해 20세기 역사를, 문화를 읽고 배울 수 있다. "내 콜렉션 자체가 작품이요, 철학이다. 내 인생관이 모두 들어있다. 대중을 향해 기도하는 내 마음이 담겨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런 의미가 담긴 작품들을 모았다. 사실은 일본에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려던 계획을 접고, 이를 광주에 펼치게 된 것이다. 예향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만큼 광주에 대한 실망은 없었을까. "작품의 숫자가 무슨 의미 있나. 작품이 말해주는 정신과 문화 등 학술적 의미가 중요하다. 이를 다중이 공유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관도, 광주시민도 노력해야 한다." 학술적 의미 조명에서 미술관으로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환경이나, 작품 관리를 국제문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립미술관의 예산 등 열악한 환경도 그는 잘 이해한다. 그래서 무리한 요구도 못한다. 2차 기증 후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광주 문화계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행정가의 문화마인드 결여를 지적한다. 당장에는 어렵겠지만 외국에 나가서 보고 배워 광주의 문화예술 시야가 보다 확장되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벌었는데, 그만큼 무지막지하게 버렸습니다. 이제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 가볍습니다. 이건 내 진심인데, 이 말 자체를 의심하면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걱정됩니다." 더 말하면 "가슴 아프다. 눈물 나온다"고 말을 삼킨다. 예향 광주를 사랑하는 그의 진심은 '정말 아낌없이 내 것을 내놓아 본 사람만이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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